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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보(徐耕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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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임세(任世)
호(號)묘옹(卯翁)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771(영조 47)
졸년1839(헌종 5)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유로(徐有老)
생부서유신(徐有臣)
저서『묘옹집』

[상세내용]

서경보(徐耕輔)
1771년(영조 47)∼1839년(헌종 5)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임세(任世), 호는 묘옹(卯翁).

문헌공 서종태(徐宗泰)의 현손으로,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서영보(徐榮輔)의 동생이다. 어려서 서유로(徐有老)의 양자로 들어갔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순창예천군수를 지내다가, 1825년(순조 25)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1827년 이조참의를 거쳐, 1828년 전라도감찰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전라좌도암행어사 유성환(兪星煥)으로부터 도내의 정무를 게을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

1832년 호군(護軍)으로 있던 중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로 발탁되었고, 그해 형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우포장(右捕將) 김영(金煐)의 과실로 인해 다시 파직당하였다.

그해 말 동지사(冬至使)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이듬해 연경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로 특채되었다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지낸 공로로 가자(加資)되었고, 1836년(헌종 2) 이조판서를 거쳐, 1837년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영흥부(永興府)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해둔 태조의 영정이 찢겨진 사건이 일어나 다시 파직되었다가, 공조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묘옹집』, 편서로는 『기백편(己百編)』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대표명서경보(徐耕輔)
성명서경보(徐耕輔), 서경보(徐畊輔)
시호문정(文靖)
임세(任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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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