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헌(李堯憲)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94D5CCB1766X0 |
자(字) | 계술(季述) |
호(號) | 소소옹(笑笑翁) |
시호(諡號) | 숙렬(肅烈) |
생년 | 1766(영조 42) |
졸년 | 1815(순조 15)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이명걸(李命杰) |
5대조 | 계(季) |
출생지 | 훈도방(薰陶坊)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요헌(李堯憲)
1766년(영조 42)∼1815년(순조 15).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술(季述), 호는 소소옹(笑笑翁).
선조의 제13자 영성군(寧城君) 계(季)의 5세손이며, 성주목사 이명걸(李命杰)의 아들이다. 한양의 훈도방(薰陶坊)에서 태어났다.
1785년(정조 9)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전관 등 여러 군직(軍職)을 거쳤는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등극 후 좌승지‧우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병마절도사‧경기도수군절도사‧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으로 우포도대장‧금군별장‧훈국중군(訓局中軍)‧총융사‧한성좌우윤‧어영대장‧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811년 평안병사가 되었을 때, 형이 황주목사로 부임하자 불편함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해 겨울에 홍경래(洪景來)가 청북(淸北)에서 난을 일으키자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에 임명되었다. 명을 받은 뒤 곧바로 군영을 열고 계획을 세웠는데 묘당(廟堂)의 의론을 써서 부수(副帥) 박기풍(朴基豊)‧유후원(柳厚源)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총괄하였는데, 그때 적이 정주성에 머무르면서 성을 굳게 지켜 쉽게 함락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근심하여 여러번 단기(單騎)로 적에 가기를 청하였다.
군영에서 5개월을 보내면서 잠시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여러 차례 글을 지어 서민(西民)에게 충역화복(忠逆禍福)을 깨우치고,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관(棺)이 도성문을 지날 때, 손수 제문을 지었다. 정주성의 함락에는 그의 공이 실로 컸으므로 논공할 때 원훈(元勳)으로 봉하여졌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812년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813년 지중추부사로 지의금부사‧지훈련원사를 겸하였고, 1814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독서와 시를 즐겼고, 글씨를 잘 썼으며, 활을 잘 쏘았다. 시호는 숙렬(肅烈)이다.
선조의 제13자 영성군(寧城君) 계(季)의 5세손이며, 성주목사 이명걸(李命杰)의 아들이다. 한양의 훈도방(薰陶坊)에서 태어났다.
1785년(정조 9)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전관 등 여러 군직(軍職)을 거쳤는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등극 후 좌승지‧우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병마절도사‧경기도수군절도사‧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으로 우포도대장‧금군별장‧훈국중군(訓局中軍)‧총융사‧한성좌우윤‧어영대장‧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811년 평안병사가 되었을 때, 형이 황주목사로 부임하자 불편함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해 겨울에 홍경래(洪景來)가 청북(淸北)에서 난을 일으키자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에 임명되었다. 명을 받은 뒤 곧바로 군영을 열고 계획을 세웠는데 묘당(廟堂)의 의론을 써서 부수(副帥) 박기풍(朴基豊)‧유후원(柳厚源)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총괄하였는데, 그때 적이 정주성에 머무르면서 성을 굳게 지켜 쉽게 함락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근심하여 여러번 단기(單騎)로 적에 가기를 청하였다.
군영에서 5개월을 보내면서 잠시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여러 차례 글을 지어 서민(西民)에게 충역화복(忠逆禍福)을 깨우치고,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관(棺)이 도성문을 지날 때, 손수 제문을 지었다. 정주성의 함락에는 그의 공이 실로 컸으므로 논공할 때 원훈(元勳)으로 봉하여졌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812년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813년 지중추부사로 지의금부사‧지훈련원사를 겸하였고, 1814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독서와 시를 즐겼고, 글씨를 잘 썼으며, 활을 잘 쏘았다. 시호는 숙렬(肅烈)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西行日記
純祖實錄
西行日記
[집필자]
김도련(金都鍊)
명 : "요헌(堯憲)"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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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