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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순(金祖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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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낙순(洛淳)
자(字)사원(士源)
호(號)풍고(楓皐)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765(영조 41)
졸년1832(순조 32)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이중(金履中)
4대조김창집(金昌集)
저서『풍고집(楓皐集)』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조순(金祖淳)
1765년(영조 41)∼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초명은 김낙순(金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순조의 장인으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이며 부친은 부사 김이중(金履中)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황해도함경도 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兼史) 1명을 두어 그 지방 요속(謠俗)을 채록하여 시정기(時政記)에 수록하도록 할 것을 건의, 실시했다.

1788년 규장각대교(待敎)때 당시 시‧벽파(時僻派)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92년(정조 16) 동지 겸 사은사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직각을 거쳐 1800년 보덕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에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로 친위병의 수효가 적다고 하여, 철폐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주청하여 시행했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 대제학이 되고, 1827년 왕의 관서지방 목욕행을 호종하였다가 서하(西下)지방의 은밀한 민간실정을 보고하여서, 경외(京外)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인사(人事)‧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고 왕세자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국구(國舅)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당파에 몰리지 않으려는 노력과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세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楓皐集)』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續朝野輯要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7-22정조실록 35권,1792년 8월 24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간 해를 1789에서 1792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