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윤(張錫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A5C11DC724B1764X0 |
자(字) | 백영(伯永) |
생년 | 1764(영조 40)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덕수(德水)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장석윤(張錫胤)
1764년(영조 40)∼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백영(伯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증조부는 장설(張楔)이고, 조부는 장진엽(張震燁)이다. 부친 장지복(張至復)과 모친 신사석(申思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86년(정조 10)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798년(정조 22) 현풍현감 재직 시절 추곡하모(秋穀夏牟)를 절반은 원회곡(元會穀)으로 절반은 돈으로 바칠 것을 주장하였다. 성주(星州)의 노장곡면(蘆長谷面) 10리를 현훙으로 옮겨 그 소출을 사용하게 해줄 것과 조창과 왜관 두 곳에 하납(下納)하는 일을 시정해 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1802년(순조 2) 외직으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을 감찰하고 불합리한 실정을 고쳐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응교(應敎) 재임 시절 전라남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증조부는 장설(張楔)이고, 조부는 장진엽(張震燁)이다. 부친 장지복(張至復)과 모친 신사석(申思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86년(정조 10)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798년(정조 22) 현풍현감 재직 시절 추곡하모(秋穀夏牟)를 절반은 원회곡(元會穀)으로 절반은 돈으로 바칠 것을 주장하였다. 성주(星州)의 노장곡면(蘆長谷面) 10리를 현훙으로 옮겨 그 소출을 사용하게 해줄 것과 조창과 왜관 두 곳에 하납(下納)하는 일을 시정해 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1802년(순조 2) 외직으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을 감찰하고 불합리한 실정을 고쳐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응교(應敎) 재임 시절 전라남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國朝榜目
正祖實錄
國朝榜目
正祖實錄
[집필자]
김혜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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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