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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관(鄭東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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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문첨(文詹)
생년1762(영조 38)
졸년1809(순조 9)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정노순(鄭魯淳)

[상세내용]

정동관(鄭東觀)
1762년(영조 38)~1809(순조 9)(주1)
졸년
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졸년 추가함.
.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문첨(文詹)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정욱선(鄭勗先)이고, 조부는 정석행(鄭錫行)이며, 부친은 정노순(鄭魯淳)으로 장남이다. 외조부는 청송심씨 첨정(僉正) 심인지(沈麟之)이고, 처부는 풍양조씨 조정진(趙鼎鎭)과 파평윤씨 윤광형(尹光衡)이다.

1783년(정조 7) 계묘 증광시(增廣試)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동년(同年) 계묘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 하였다.

관직은 1784년(정조 8) 낭청(郎廳)을 시작으로 1785년(정조 9)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고, 1787년(정조 11)에는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선발되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790년(정조 14) 경시관(京試官)으로 경상도에 다녀와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이 되었다. 이듬해 암행어사(暗行御史)로 과천(果川), 금천(衿川), 수원(水原), 광주(廣州) 등 여러 고을에서 민간의 폐단과 고통을 살피고 돌아왔다.

1792년(정조 16) 사간(司諫)으로 채제공(蔡濟恭)을 중도부처 할 것을 건의 하여 풍천부에 부처하도록 하였다.

1793년(정조 17)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황인점(黃仁點)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에 다녀왔다. 1794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어사가 되어 경기 안성(安城)에 가서 수령의 잘 잘못을 규찰(糾察)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돌아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다.

1797년(정조 21) 강령현감(康翎縣監)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원자(元子)의 요속(僚屬)이 되었다. 1798년 부사과(副司果)로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대축(大祝)을 하여 가자(加資) 되었다.

1801년(순조 1) 승지(承旨)를 거처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었다. 1804년(순조 4)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歷任)한 후 이듬해 다시 사간원대사간, 이조참의를 거처 1806년(순조 6) 아경(亞卿)으로 발탁(拔擢)되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올랐으나 같은 해 관록(館錄) 권점(圈點)을 완결 짓지 못하여 경기 바닷가로 귀양 갔다가 곧 석방되었다. 1807년(순조 7)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에 차임(差任) 되었다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1809년(순조 9)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사퇴 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원종(鄭源宗)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