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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득영(趙得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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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여(德汝)
호(號)일곡(日谷)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762(영조 38)
졸년1824(순조 24)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진명(趙鎭明)
정부인(貞夫人김씨)

[상세내용]

조득영(趙得永)
1762년(영조 38)∼1824년(순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덕여(德汝), 호는 일곡(日谷).

서윤(庶尹) 조진명(趙鎭明)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 1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경기도도사홍문관수찬을 거쳐 1801년(순조 1)이후 예조참의부산첨사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806년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 김대비 세력인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연석(筵席)에서 저지른 사건을 탄핵, 처벌하게 함으로써 대과(大過)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 하여 이조참판에 오르고, 다시 병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그뒤 이조예조판서를 거쳐 1808년 평안도관찰사 재직시 평안도병사 이광익(李光益)의주부윤 윤익렬(尹益烈)의 비위를 지적, 논죄하였으나, 같은해 평안도암행어사 서능보(徐能輔)의 탄핵을 받아 그 자신이 부정, 포학한 지방장관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때 어머니인 정부인(貞夫人)김씨의 탄원 결과, 암행어사의 보고가 적실하지 못하였음이 밝혀짐에 따라 도리어 당시 부사과로 있던 서능보가 파직당하고, 그는 다시 복직되어 형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812년 척신 박종경(朴宗慶)에 대한 비위사실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도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

6년 뒤에야 특명으로 향리에 옮겨졌다가 1819년 여러 대신과 삼사 관원들의 청원에 의하여 오랜 유배생활에서 풀려나왔다. 곧이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하여 사임하고 관직을 떠났다.

뒤에 다시 좌(左)우빈객(右賓客), 우참찬대사헌대호군 등에 임명된 일이 있다.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日谷集
韓國故事大典(金舜東, 回想社, 1965)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