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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렬(尹命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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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언국(彦國)
호(號)석유(石囿)
시호(諡號)충헌(忠憲)
생년1762(영조 38)
졸년1832(순조 32)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면동(尹冕東)
생부윤기동(尹紀東)

[상세내용]

윤명렬(尹命烈)
1762년(영조 38)∼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언국(彦國), 호는 석유(石囿).

윤기동(尹紀東)의 아들로 뒤에 윤면동(尹冕東)에게 입양되었다.

1789년(정조 13)의 삼일제(三日製)에 장원하여 곧 전시(殿試)에 나아갔으나, 상신 채제공(蔡濟恭)은 제술(製述)이 아름답지 않다 하여 삭과(削科)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람의 부친은 책을 읽은 단정하고 깨끗한 선비인데, 그 아들이 글을 못한다고 헐뜯는 것은 이상하다 하고, 면시(面試)에 합격시켜 복과(復科)를 명하였다.

그뒤 사헌부감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좌승지가 되었는데, 이때 왜어역관(倭語譯官) 등이 왜인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서계(書契)와 도서(圖書)를 위조한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동래부안핵사가 되어 동래에 내려가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 범인을 엄벌하였다.

다시 병조참지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고, 뒤에 형조참의강릉부사대사간좌승지호조참판을 역임하고 사신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의 수도 연경(燕京)에 머무르는 동안 몸가짐을 근엄하게 하는 동시에 유람을 일삼지 않고, 공무가 아니면 한 발도 관외(館外)에 나가지 않아 비리에 관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고 어렵게 여겼다. 이어 병조참판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가의대부의 관계에 올라 이조참판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평소에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여 관료생활 40년에 내외의 요직을 거쳤지만 집안의 재산이 조금도 불어난 것이 없었고, 세속적인 권세와 이익, 그리고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조금도 부러워하는 기색 없이 예사로 보아 넘겼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그를 충후장덕(忠厚長德)으로 추장(推奬)하였다. 영고(零稿)가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梅山集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