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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묵(韓象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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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구(元龜)
생년1760(영조 36)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한영효(韓榮孝)

[상세내용]

한상묵(韓象黙)
1760년(영조 36)~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근지(近之)‧원구(元龜)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한세정(韓世貞)이고, 조부는 한철(韓澈)이며, 부친은 한영효(韓榮孝)이다. 외조부는 고보일(高輔一)이다.

1803년(순조 3) 증광시에 진사 2등 3위로 합격하였으며, 같은 해 증광시에 을과 1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운산군수(雲山郡守)‧제주목사(濟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811년(순조 11) 운산군수로 재직 당시 평안북도 가산(嘉山)에서 금을 채취하는 무리들이 변고를 일으켰다. 이에 지방관이 금의 채취를 금지시키는 조치가 엄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이 발생하였다는 지적을 받아 파출(罷黜)되었다. 1812년(순조 12)에 영의정(領議政) 김재찬(金載瓚)이 상소하여 그가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며, 토적(土賊)들의 난리에 대한 기미를 미리 정탐하여 성을 굳건히 지켰음에도 논상(論賞)에서 제외된 부당함을 지적하며, 이에 따라 별도로 장려하고 발탁하여 정사를 위해 쓰도록 요청하였다. 1820년(순조 20) 제주목사 시절에 정의현(旌義縣)의 호촌포(狐村浦)에 유구국(琉球國) 사람들이 표류하여 정박하고 있었는데, 1794년(정조 18)의 전례(典例)에 따라 육로로 돌아가게 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