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홍수만(洪秀晩)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4DC218B9CCB1759X0
자(字)치성(穉成)
생년1759(영조 35)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홍성연(洪聖淵)

[상세내용]

홍수만(洪秀晩)
1759년(영조 35)~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치성(穉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唐])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홍응몽(洪應夢)이고, 조부는 홍경하(洪景夏)이며, 부친은 경원진관병마동첨절제사(慶源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지낸 홍성연(洪聖淵)이다. 외조부는 이겸보(李兼普)이고, 처부는 윤행원(尹行元)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시 진사 3등 6위로 입격하였고, 다음 해인 1790년(정조 14) 증광시 병과 30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792년(정조 16) 3월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등재되었다. 1794년(정조 18) 김종수(金鍾秀)를 경상북도 평해군(平海郡)에 부처(付處)하라고 주청하는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 헌납(獻納)으로 참여하였다. 1795년(정조 19) 양사(兩司)가 권세에 기대어 재물을 탐하고 임금을 무함한 죄를 지은 정동준(鄭東浚)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합계할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참여하였고, 오익환(吳翼煥)의 죄를 들어 탄핵하다가 오히려 유배를 당할 뻔하였다. 그해 4월 정치달(鄭致達)과 세룡(世龍)의 처에 대한 형벌을 관대하게 바꾼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기를 요청하는 홍문관(弘文館)의 연명 상소에 수찬(修撰)으로 가담하였다. 1801년(순조 1) 삼사의 관원들과 함께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과 홍낙임(洪樂任)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1802년(순조 2)에 왕의 국혼 때 가례도감에 관여한 관원들에게 공로를 치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802년(순조 2) 비변사에서 어사(御史)에 합당한 사람을 뽑는데 선발되었다. 1807년(순조 7) 병조참의(兵曹參議)로서 병조의 당직에 무단으로 입직하지 않아 무주부(茂朱府)에 정배(定配)되었다. 1809년(순조 9)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1813년(순조 13) 동래부사(東萊府使), 1819년(순조 19)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1820년(순조 20)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榜目正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이동인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