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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치규(宋穉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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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기옥(奇玉)
호(號)강재(剛齋)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759(영조 35)
졸년1838(헌종 4)
시대조선후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학자 > 유생
송환명(宋煥明)
평산신씨(平山申氏)
외조부신사덕(申思德)
저서『강재집』

[관련정보]

[상세내용]

송치규(宋穉圭)
1759년(영조 35)∼1838년(헌종 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

부친은 송환명(宋煥明)이며, 모친은 평산신씨(平山申氏)신사덕(申思德)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黙)의 문인이다.

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아, 평생을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것을 비롯,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호조좌랑, 1801년(순조 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집의,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공조참의, 1815년 시강원찬선공조참판, 1816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으로 전한다.

그러나 72세가 되던 1830년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찬선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838년(헌종 4) 80세의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강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剛齋集
梅山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