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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신(權常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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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호(絅好)
호(號)서어(西漁)
시호(諡號)효헌(孝獻)
생년1759(영조 35)
졸년1824(순조 24)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식(權植)
조부권도(權導)

[상세내용]

권상신(權常愼)
1759년(영조 35)∼1824년(순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호(絅好), 호는 일홍당(日紅堂) 또는 서어(西漁).

조부는 예조판서 권도(權導)이며, 부친은 권식(權植)이다.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 장원하여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역임하고 1801년(순조 1)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으로 증광문과의 장원에 이어 전시(殿試)에도 장원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1803년 부사로서 정사 남공철(南公轍)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1810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면서 당시 점점 확대되어가는 환곡과 군정의 폐단에 대해 논하였는데, 제도의 경장보다는 운영의 합리화를 주장하였다.

또, 1817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서 조운의 편의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김조순(金祖淳)을 옹호하여 1820년에는 병조판서광주유수를 지내면서 남공철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의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서학(西學)문제에서도 ‘척사(斥邪)’보다도 ‘부정학(扶正學)’을 내세우는 정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1822년 조인영(趙寅永)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혼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김구주(金龜柱)심환지(沈煥之)권유(權裕)를 격렬히 비판함으로써 함경도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리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한 어부로서 지내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182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연경에 가는 도중 병으로 죽었다. 주희(朱熹)송시열(宋時烈)을 존경하였으며, 심상규(沈象奎)김상임(金相任)임이주(任履周)김이영(金履永)김희순(金羲淳) 등과 교유하여, 김홍도(金弘道)가 그들의 모임을 그린 「은암아집도(隱巖雅集圖)」가 있다.

홍직필(洪直弼)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국조대학연의(國朝大學衍義)』를 엮었으며, 저서로는 『서어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西漁遺稿
梅山集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