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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석(鄭晩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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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보(成甫)
호(號)과재(過齋)
시호(諡號)숙헌(肅獻)
생년1758(영조 34)
졸년1834(순조 34)
시대조선후기
본관온양(溫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기안(鄭基安)
저서『관서신미록』

[상세내용]

정만석(鄭晩錫)
1758년(영조 34)∼1834년(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 지중추부사 정기안(鄭基安)의 아들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5년 성균관전적병조참의를 거쳐 1794년에 지평에 이르렀다. 그해 11월 양근가평어사가 된 뒤 호남호서 암행어사로 나가 명성을 떨쳤다. 1798년 영일현감으로 외보(外補)되었다. 1801년(순조 1) 교리를 거쳐 하정사(賀正使)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뒤 경상우도암행어사를 거쳐 1803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뇌물을 받고 대마도(對馬島)와의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을 처벌하였다. 1807년 공충도관찰사를 거쳐,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발생하자 민심수습을 위하여 관서위무사(關西慰撫使)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민심수습을 위한 호포(戶布) 징수상의 문제와 논공행상의 불철저로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평안감사가 되었다. 그는 감사로 있으면서 홍경래 관련 죄인들의 문초를 담당하였는데, 이 기록을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이라 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이것은 그가 또 『계첩기략(啓牒記略)』이라 하여 올린 것과 함께 조정에서 이용된 홍경래난의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

1815년(순조 15) 한성부판윤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1819년 동지정사(冬至正使)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외보되었다가 다시 경직(京職)으로 돌아와 요직을 역임하였고, 1829년 우의정이 되었다.

외보되어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일컬어졌으며, 중앙에서는 국가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호조판서선혜청당상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나 번세(煩細)에 얽매여 대체(大體)에 어두웠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 전하는 저서로는 『관서신미록』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典故大方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