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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원(李肇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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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혼(景混)
호(號)옥호(玉壺)
생년1758(영조 34)
졸년1832(순조 32)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민보(李敏輔)

[상세내용]

이조원(李肇源)
1758년(영조 34)∼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혼(景混), 호는 옥호(玉壺). 판서 이민보(李敏輔)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이듬해 호서암행어사로 나갔다. 그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어 김종수(金鍾秀)정만석(鄭晩錫) 등의 치죄를 요청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폈으며, 용인진위어사(龍仁振威御史)로 다녀와 대사간이 되었다가 곧 승지로 체직되었다.

순조 즉위 후 이조참의대사간이조참판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들어와 다시 이조참판이 되고 가일자(加一資)되었다.

1812년(순조 12) 형조판서를 제수받았다가 한성 서부의 사대부가 노비가 그 자식을 죽이고 도망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었으며, 얼마 후 좌참찬으로 서용되고 예조판서를 거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그뒤 홍문관제학우참찬대사헌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다시 이조판서로 재직중이던 1816년 동지정사(冬至正使)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와 홍문관제학좌빈객(左賓客)우참찬을 거쳐 평안감사로 외보(外補)되었다가 형조판서를 배수받았다.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賀正使)로 청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27년 승지 이해청(李海靑)과 양사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하였을 때 김기서(金基敍)김기후(金基厚)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탄핵하자 봉조하(奉朝賀)로서 그 사실은 무고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안치되어 있던 중 물고(物故)되었고, 사후 참시당하였다.

그는 풍양조씨계의 당여(黨與)로 안동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1835년(헌종 1)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신원(伸寃)되었다.

그는 글씨를 잘 썼고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典故大方
槿域書畵徵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