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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순(李頤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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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비언(斐彦)
호(號)후계(後溪)
호(號)만와(晩窩)
호(號)육우당(六友堂)
호(號)긍재(兢齋)
호(號)육우헌(六友軒)
호(號)기은(杞隱)
생년1754(영조 30)
졸년1832(순조 32)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성(眞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귀몽(李龜蒙)
처부이한우(李漢佑)
외조부김택동(金宅東)
출신지경상북도 봉화
저서『후계집(後溪集)』

[상세내용]

이이순(李頤淳)
1754년(영조 30)∼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치양(穉養), 초자는 비언(斐彦), 호는 후계(後溪)만와(晩窩)긍재(兢齋)육우당(六友堂)육우헌(六友軒)기은(杞隱). 경상북도 봉화 출신. 이황(李滉)의 9세손으로, 이구몽(李龜蒙)의 아들이며, 모친은 김택동(金宅東)의 딸이다.

6남 2녀 중 차남으로 6형제 중 유일하게 현감벼슬을 하였으며, 형제 중 문장이 가장 뛰어났다.

8세 때 삼종 이세윤(李世胤)으로부터 『소학』을 배웠고, 18세에 이한우(李漢佑)의 딸과 혼인하였다.

1779년(정조 3)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태학에 들어갔다.

1786년 만촌(晩村)에 이사하여 그 집을 만와(晩窩)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790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옛집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799년 효릉재관(참봉)에 제수되었고, 1802년(순조 2)에는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에 올라 대조전을 수리하였다. 일이 끝나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이 되고 그해 가을에는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805년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어 재정을 윤택하게 관리하였고, 이듬해인 1806년에는 은진현감이 되어 단옥(斷獄)을 공평히 하고 상벌을 엄격히 하였다.

그러나 죽림서원(竹林書院)의 유생 중에 군역을 기피하던 많은 양민 장정을 정리하려다가 감영의 힘을 빌어 이를 저지하던 유생들과 충돌을 빚고 이 일로 감영의 뜻을 거스렸다하여 그해 겨울 부임 9개월만에 물러났다.

그뒤 1811년 가을, 후계서당(後溪書堂)을 짓고 독서와 예서에 잠심(潛心)하였다. 음양서와 농공기술에 두루 통하였으며 절약하는 생활을 하였다. 가문의 대소사를 주장하고 후세손에게 규범으로 하고자 「무첨가(無忝歌)」를 지었다.

이황의 문집을 교검(校檢), 개간(改刊)하고 몽재(蒙齋)청벽(淸壁)만호(晩湖) 등의 유문을 수습하여 『계산세고(溪山世稿)』 3책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후계집(後溪集)』이 전하며, 작품으로는 「화왕전(花王傳)」과 「일락정기(一樂亭記)」가 있다.

[참고문헌]

李朝漢文小說選(李家源, 民衆書館, 1961)
李朝小說의 作者와 讀者에 대하여(金東旭, 池憲英先生回甲紀念論叢, 1971)
一樂亭記解題(金起東, 筆寫本 古小說全集 5, 亞細亞文化社, 1980)
조선 후기의 小說論(張孝鉉, 어문론집 23, 고려대학교, 1982)
一樂亭記 作者小考(申東一, 국어국문학 99, 1988)

[집필자]

신동일(申東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