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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金宇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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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래(聖來)
생년1754(영조 30)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강릉(江陵)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상철(金尙喆)

[상세내용]

김우진(金宇鎭)
1754년(영조 30)∼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성래(聖來).

부친은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에 기용되어 1772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779년(정조 3)에 부수찬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이때 내의원 액예(掖隷)들이 약재를 징발하고 의관들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등의 작폐를 논하고 엄히 치죄할 것을 건의하였다.

1780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역임하고 1782년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승지를 거쳐 1783년 대사성이조참의광주유수(廣州留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뒤 1786년까지 이조참의대사성을 지냈다.

1779년에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정조가 후사가 없자,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아들 완풍군(完豊君) 이담(李湛)을 후사로 삼으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반역죄로 몰아 살해하게 하였는데, 평소 이담과 친하여 그의 혼인 때 혼수를 보내 도운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어 이담의 역모와 관련, 추국(推鞫)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791년(정조 15) 부친상을 당하여 풀려났다가 치상(治喪) 후 교동(喬桐)으로 이배되었다.

1830년(순조 30) 손자 김긍창(金兢昌)의 탄원으로 신원되어 그 관작이 회복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江陵金氏族譜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대표명김우진(金宇鎭)
우진(宇鎭)
성명김우진(金宇鎭)

명 : "우진(宇鎭)"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待闡錄v4後時偉移配濟州與宇鎭幷荐棘
待闡錄v4罪又以趙時偉不滿於文孝誕降之礿至有稠座云云之說金甲島安置金宇鎭以爲湛通婚庭鞫至捧顧瞻他日之供濟州安置宇鎭卽金相尙喆之子也尙喆之庶子爲善復之壻故干連其獄而尙喆則不問後時偉移配濟州與宇鎭幷荐棘
玄駒說v2時偉 不滿於文孝 誕降之初至有稠座云云之說金甲島安置某官金宇鎭 以爲湛通婚庭鞠有顧瞻他日之供濟州安置宇鎭 卽金相尙喆 之子也尙喆 之庶子爲善復 之壻故干連其獄而尙喆 不問後時偉移配濟州與宇鎭 皆荐棘
玄駒說v2日之供濟州安置宇鎭 卽金相尙喆 之子也尙喆 之庶子爲善復 之壻故干連其獄而尙喆 不問後時偉移配濟州與宇鎭 皆荐棘
國朝捷錄v01字士保江陵人判書始赫子宇鎭父丙戌拜至領丙申院相因金若行疏遆致仕奉朝賀判書始煥侄啓洛再從祖湖堂善餘玄孫
推鞠日記v7書其 跡則未可謂盡綻貸其一線之喘似不至失刑因此 而反復思惟朝家之於院相必不欲直盤劍已有牢定于中者罪人宇鎭濟州牧大靜縣減死圍籬安 置前下判付一通使摘奸使史官與獄官眼同曉諭後 仍以本府入直都事此沓門押送今夜內
推鞠日記v7可謂之爲國家上變乎此一節更良直 告供曰矣身缺苟有所知不敢欺漏以厚 饋一事至今記得故果入於上變中矣問曰宇鎭之缺缺言端旣發而半呑半吐終不指陳其情節及數爻一例泛稱以未及探知者語極 殊常兺不喩此等事虛實無甚關係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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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