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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동(尹魯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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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담(聖膽)
호(號)용서(蓉西)
생년1753(영조 29)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윤득수(尹得秀)

[상세내용]

윤노동(尹魯東)
1753년(영조 29)~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성담(聖膽)이고, 호는 용서(蓉西)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윤세량(尹世亮)이고, 조부는 윤광(尹洸)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윤득수(尹得秀)이다. 외조부는 송징래(宋徵來)이고, 처부는 조재홍(趙載洪)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시 진사 3등 56위에 합격하였고, 1790년(정조 14) 증광시 갑과 3위에 문과 급제하였다. 1792년(정조 16) 이상황(李相璜)‧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등재되었다. 1793년(정조 17)에 구휼책(救恤策)을 감독하기 위해 호서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에 뽑혔으나, 자기 담당 이외의 고을을 사찰하고, 관첩(關帖)에 서명(署名)하여 신분을 노출시키는 잘못을 하여 파직되었다. 1795년(정조 19) 종묘(宗廟)의 제례를 앞두고 재계(齋戒)하고 있어야 함에도 정동준(鄭東浚)의 죽음에 조문했다는 이유로 정언(正言) 민사선(閔師宣)의 탄핵을 받았다. 1798년(정조 22)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재직 당시 구언전지(求言傳旨)에 응하여 도내의 각종 진전(陳田)의 측량과 조세 문제, 밀양(密陽)의 조창(漕倉)과 환곡의 폐단, 기장(機張)의 세금 수취와 진상의 폐단, 명길도(鳴吉島)의 소금가마, 선안(船案)에 대한 법, 말의 외양가(喂養價)와 속가(贖價)의 문제, 돈으로 받아들이는 환정(還政)의 폐단, 대동 면포(大同綿布), 산산(蒜山)의 죽도(竹島)에 조창 설치 등의 내용을 진달하였다. 1805년(순조 5)에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806년(순조 6)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삼사(三司)의 합사(合辭)에 참여하여 김관주(金觀柱)의 삭직을 주청하였고, 이어 연차(聯箚)를 올려 김한록(金漢祿)의 관직을 추탈(追奪)하고 노륙(孥戮)의 형전을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1807년(순조 7)에 부향(袝享) 친제(親祭) 때 도청(都廳)으로 참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808년(순조 8)에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었고, 1809년(순조 9)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 1809년(순조 9) 동래부사로서 일본에서 온 통역관이 글로 남긴 내용에 대해 보고하였고, 대마주태수(對馬州太守) 습유(拾遺) 평의공(平義功)이 보내온 서계(書啓)와 별폭(別幅)을 조정에 올렸다. 1810년(순조 10) 통신사(通信使)의 호행대차왜(護行大差倭)가 나왔음을 전하였고, 통신사(通信使)가 거행할 조목을 결정하라고 강정역관(講定譯官) 현식(玄烒) 등에게 신칙(申飭)할 것을 아뢰고 서계를 올렸다. 1813년(순조 13) 정조(正祖)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장수하기를 기원한 것에 대하여 부호군(副護軍으)로서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 1815년(순조 15)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윗분의 복이 끝날 때까지 조정 신하들이 천담복(淺淡服)을 입는 일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1816년(순조 16)과 1820년(순조 20)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821년(순조 21)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었고, 천릉도감(遷陵都監)에서 지방서사관(紙牓書寫官)의 직책을 수행한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되었다. 1822년(순조 22) 강화유수에 재직 당시 삼사나 법관도 아닌 지방 장관으로서 법을 지키겠다는 장계를 올려 삭탈관직을 당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榜目
正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이동인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