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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수(徐美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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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오여(五汝)
자(字)공미(公美)
호(號)담포(澹圃)
생년1752(영조 28)
졸년1809(순조 9)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서명헌(徐命憲)

[상세내용]

서미수(徐美修)
1752년(영조 28)~1809년(순조 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오여(五汝) 또는 공미(公美)이고, 호는 담포(澹圃)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서문택(徐文澤)이고, 조부는 서종업(徐宗業)이며, 부친은 서명헌(徐命憲)이다. 외조부는 조재언(趙載彦)이다.

1780년(정조 4) 식년시에서 병과 18위로 문과 급제했다. 1782년(정조 6)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홍문관교리(校理)를 거쳐 1793년(정조 17)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었고, 1794년(정조 18)에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으며, 이후 대사간과 승지를 연이어 지냈다.

1794년(정조 18)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한 토역을 주장한 채제공(蔡濟恭)과 맞서다가 유배된 김종수(金鍾秀)의 위리안치 명을 거두지 말 것을 청하였을 때, 승지로서 ‘김종수의 죄는 한도에 꽉 찼고 법안도 이미 갖춰져 물리칠 수 없다’는 원론을 주장하며 ‘정확한 죄상을 말하라’는 정조와 대립하였다. 같은 해에 광주부사(廣州府使)를 거쳐 1795년(정조 19)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낸 뒤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1797년(정조 21)에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고, 1799년(정조 23)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사행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