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호(林漢浩)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D55CD638B1752X0 |
자(字) | 경소(景昭) |
시호(諡號) | 정간(貞簡) |
생년 | 1752(영조 28) |
졸년 | 1827(순조 2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나주(羅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임상원(林象元)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한호(林漢浩)
1752년(영조 28)∼1827년(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경소(景昭). 승지 임상원(林象元)의 아들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수찬‧함경도북평사‧암행어사‧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03년(순조 3) 대사간으로 있을 때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을 반대, 한때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온 뒤 이조참의‧강원도관찰사‧이조참판‧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81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판의금부사‧세자시강원우빈객‧좌참찬을 지낸 다음 우의정에 올랐으나 질병으로 거듭 사직을 청원, 허락되지 않다가 1823년 판중추부사로 전임된 뒤 관직을 떠났다. 퇴임 직전에 건의된 서얼(庶孽)을 위한 인재등용책은 간접적이나마 세도정치로 부패된 관계숙정(官界肅正)의 한 방안이 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소박하여 세리(勢利)에 물들지 않았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세칭 ‘복인(福人)’이라 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수찬‧함경도북평사‧암행어사‧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03년(순조 3) 대사간으로 있을 때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을 반대, 한때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온 뒤 이조참의‧강원도관찰사‧이조참판‧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81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판의금부사‧세자시강원우빈객‧좌참찬을 지낸 다음 우의정에 올랐으나 질병으로 거듭 사직을 청원, 허락되지 않다가 1823년 판중추부사로 전임된 뒤 관직을 떠났다. 퇴임 직전에 건의된 서얼(庶孽)을 위한 인재등용책은 간접적이나마 세도정치로 부패된 관계숙정(官界肅正)의 한 방안이 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소박하여 세리(勢利)에 물들지 않았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세칭 ‘복인(福人)’이라 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人物志
純祖實錄
國朝人物志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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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