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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겸(鄭厚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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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익(伯益)
생년1749(영조 25)
졸년1776(정조 즉위)
시대조선후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치달(鄭致達)
화완옹주(和緩翁主)
생부정석달(鄭錫達)

[상세내용]

정후겸(鄭厚謙)
1749년(영조 25)∼1776년(정조 즉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백익(伯益). 정석달(鄭錫達)의 아들로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입양되었다.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출신(庶人出身)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 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으며, 영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세손(世孫: 정조)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자 화완옹주홍인한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어 세자의 언동을 살피게 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洪國榮)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광분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군신들이 그를 주살할 것을 요청, 드디어 경원에 유배되어 천극(조선시대 유배된 중죄인을 가둔 가옥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외출하지 못하게 하였음)되었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日省錄
明義錄

[집필자]

김태진(金泰振)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