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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순(金文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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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재인(在人)
생년1744(영조 20)
졸년1811(순조 11)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고조부김창집(金昌集)

[상세내용]

김문순(金文淳)
1744년(영조 20)∼1811년(순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재인(在人). 고조부는 김창집(金昌集)이다.

1767년(영조 4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겸문학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문학사서를 거쳐 1773년 입사(入仕)한 지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라 승지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대사간이 되었으며 좌승지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782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노론인 그는 남인인 지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의 죄과를 논하고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곧 기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784년 동지경연사에 이어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채제공과 의가 맞지 않아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789년 이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듬해 강화 옥수(獄囚)의 처결을 지체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예조판서로 기용되어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이 되었다.

1791년 평시서제조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평택현감 이승훈(李承薰)이 천주교인으로 향교의 문묘에 알성(謁聖)할 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여론이 분분함에도 이를 처벌하지 않은 죄로 금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곧 풀려나 다시 한성판윤이 되고, 1796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이듬해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청나라에 다녀왔다.

1800년(순조 즉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1802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순조의 즉위 후 국구(國舅)인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김희순(金羲淳)과 함께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인물이 되어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804년 수원유수, 1806년 판의금부사에 이어 이조판서선혜청당상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