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득신(李得臣)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4DDC2E0B1742X0
자(字)성량(聖良)
시호(諡號)효헌(孝憲)
생년1742(영조 18)
졸년1802(순조 2)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시덕(李時德)

[상세내용]

이득신(李得臣)
1742년(영조 18)∼1802년(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량(聖良).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13세손으로, 이시덕(李時德)의 아들이다.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68년 홍문관교리에 이어 부교리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73년 승정원승지수원부사를 거쳐 다음해 대사간이 되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민심을 광혹하게 하였다는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탄핵으로 1781년(정조 5)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춘천부사가 되고, 다음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상주목사가 승려를 동원하여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수리함으로써 관할 충청감사 인그는 지방유생들로부터 책임을 추궁받기도 하였다.

1788년 대사헌이 되고 다음해에 희천군수로 전임되었는데 치적을 쌓았으며,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정조로부터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793년 형조판서가 되었을 때 수감중 병에 걸려 고생하는 전국의 죄수에게 약을 주어 치유시켰다.

2년 뒤 행부사직으로 임금의 모후 혜경궁(惠慶宮: 敬懿王后)을 추존하는 경사가 있자 가자(加資)의 은전을 받았다.

그뒤 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797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호남에 4만석을 풀어 기민(飢民)을 구제하였으며, 이 지방의 사치가 심하니 이를 엄단할 것을 상소하였다.

2년 뒤 한성부판윤이 되고 1801년(순조 1) 정조의 능을 조성하는 산릉제조(山陵提調)로서 공로가 있어 가자되었다.

그뒤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02년 병조판서에 재임중 죽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