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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리(尹行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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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741(영조 17)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윤규(尹)

[상세내용]

윤행리(尹行履)
1741년(영조 17)~미상.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증조부는 윤의(尹誼)이고, 조부는 윤창적(尹昌迪)이며, 부친은 윤규(尹)이다. 외조부는 김덕일(金德一)이다. 1763년(영조 39) 증광시 생원 3등에 30위로 합격하였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 정시 갑과에 장원으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헌납(獻納)‧사간(司諫)‧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정조 11) 헌납 시절 임금에게 상소를 하였는데 비답(批答)도 듣기 전에 먼저 인피(引避)를 한 죄를 물으라는 상소가 올라갔으나 임금의 은혜로 무사하였다. 1788년(정조 12) 대사간(大司諫) 이홍재(李洪載)‧집의 이제만(李濟萬) 등과 함께 유언호(兪彦好)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오지 않고 임금이 액정서(掖庭署)의 관리까지 보내며 조정에 들어오게 하였으나 끝까지 들어오지 않아 위리 안치되었는데 죄에 비해 벌이 너무 가볍다며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합계(合啓)를 올렸다. 1789년(정조 13) 대사헌(大司憲) 홍병찬(洪秉纘) 등과 함께 음흉한 성격에 난폭하기까지 한 이재협(李在協)이 ‘공(公)이 아닌 당(黨)을 위해 죽겠다.’는 글을 써가지고 다닌 죄를 물어야 한다는 합계를 올렸다. 1791년(정조 15) 『국조보략(國朝譜略)』을 열람하던 중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와 혼인을 하였으나 문종이 등극하기 전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문종 등극 후부터 왕비 자리가 10년간이나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헌 확인 등을 통해 사실 확인이 필요함을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正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