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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만(尹東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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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738(영조 1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윤면교(尹勉敎)

[상세내용]

윤동만(尹東晩)
1738년(영조 14)~미상.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증조부는 윤해거(尹海擧)이고, 조부는 윤부(尹扶)이며, 부친은 윤면교(尹勉敎)이다. 외조부는 조윤덕(曺允德)이고, 처부는 이경호(李景祜)이다.

1770년(영조 46) 정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부수찬(副修撰)‧도청부사과(都廳副司果)‧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승지(承旨)‧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좌윤(左尹) 등을 역임하였다.

1783년(정조 7)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展)에서 임금이 친히 혜빈(惠嬪)의 존호를 높여주었을 때, 도청부사과(都廳副司果)의 소임을 수행하여 통덕랑(通德郞)에 가자(加資)되었다. 1799년(정조 23) 황해도 곡산군(谷山郡)과 평안남도 양덕군(陽德郡)의 경계에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말달리던 곳이자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사택이 있던 하람산(霞嵐山) 치마도(馳馬道)에 비석을 세우고 임금이 내려준 어필(御筆)로 글자를 새겨 넣은 후 탁본을 떠서 임금에게 바친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다. 1801년(순조 1) 임금이 천주교인들을 국문(鞠問)하는 자리에 동의금부사로서 참여하였다. 같은 해에 대왕대비가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이고 감시하는 일에 소홀히 하여 천주교인들이 숨어들게 만들었다는 죄를 물어 유배되었다가 우의정(右議政) 서용보(徐龍輔)의 장계(狀啓)로 인해 곧바로 풀려나 재등용되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正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