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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환(朴猷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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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지(大之)
생년1738(영조 1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박헌채(朴獻采)

[상세내용]

박유환(朴猷煥)
1738년(영조 14)~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대지(大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증조부는 박수의(朴守義)이고, 조부는 박정순(朴正淳)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박헌채(朴獻采)이다. 모친은 병조참판(兵曹參判)‧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사은부사(射恩副使) 등을 지낸 김치룡(金致龍)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식년시에 생원 2등 9위로 입격하였고, 1786년(정조 10) 49세로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시호를 선포할 때 봉시인관(捧諡印官)으로 참여하였다. 1787년(정조 11) 문신응제(文臣應製)에서 입상하였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임명되었다. 1788년(정조 12)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면서, 정조의 언론탄압에 대하여 현명한 정치와 조정의 기강 진작, 언로 개방 등을 간언하였다. 1790년(정조 14)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면서, 김종수가 대간(臺諫)의 규탄에 오른 인물을 서슴없이 관원후보자로 추천하고,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의 벼슬길을 막았으며, 혜화문(惠化門)의 호군(護軍)과 부장(部將)을 묶어 하인처럼 끌고 다니다 거의 죽게 만들어 중요한 성문을 한나절이나 비워놓게 하였다고 상소를 올렸다. 1791년(정조 15)에 역모 혐의로 유배된 신기현(申驥顯)이 섬에서 나올 때, 융숭히 대접한 호남지역의 수령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주장이 심하다는 질책을 받고 체직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