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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택(李鎭宅)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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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양중(養重)
호(號)덕봉(德峰)
생년1738(영조 14)
졸년1805(순조 5)
시대조선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운배(李雲培)
영양남씨(英陽南氏)
외조부남국망(南國望)
출신지경주
저서『덕봉문집』

[상세내용]

이진택(李鎭宅)
1738년(영조 14)∼1805년(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중(養重), 호는 덕봉(德峰). 경주 출신. 부친은 이운배(李雲培)이며, 모친은 영양남씨(英陽南氏)남국망(南國望)의 딸이다. 이진원(李晉遠)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8세 때 닭싸움을 보고 “상앙의 법률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鞅法 此雞當烹食)......”이라는 글을 지어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전적예조정랑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헌부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사람이다.

또, 1793년 그가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한때,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다.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삼수로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고, 그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덕봉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김능하(金綾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