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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보(李直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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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성보(李城輔)
자(字)유종(維宗)
호(號)돈암(遯庵)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738(영조 14)
졸년1811(순조 11)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도신(李度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직보(李直輔)
1738년(영조 14)∼1811년(순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종(維宗), 호는 중주(中洲)돈암(遯庵).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으로, 이도신(李度臣)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성보(城輔)였으나, 1801년(순조 1) 대사헌에 올라 그것이 성자(姓字)와 연음이고, 더욱이 정조의 이름자를 피하려고 상소하여 직보(直輔)로 개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김양행(金亮行)에게 수학하여 크게 아낌을 받았으며, 1784년(정조 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그 이듬해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에 올랐다.

1791년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이조의정부의 추천을 받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1796년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배향하고자 논의할 때 조헌(趙憲)김집(金集)도 모두 같이 배향할 것을 역설하였다가 잠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1797년에는 다시 세자시강원우유선(右諭善)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으며, 그뒤 공조참판도승지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가 사직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취임하여 활약하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찬선(贊善)참판으로 재직하면서 크게 활약한 김원행(金元行)김양행을 표창하도록 상소하였다.

1806년(순조 6) 성균관좨주가 되고, 이어 1811년에는 다시 서연(書筵)우유선으로 태자를 가르쳤다.

그는 경사(經史)에 박통하여 평소에 언제나 선비들의 중망을 받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항상 『논어』『맹자』 중에서 인용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재물에 관심이 없어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다가 무주에서 죽었다. 뒤에 순조는 그를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承政院日記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