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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문동(尹文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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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736(영조 12)
졸년1818(순조 18)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윤득경(尹得敬)

[상세내용]

윤문동(尹文東)
1736년(영조 12)~1818년(순조 18).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회(景晦)이고, 호는 오하(梧下)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증조부는 윤세기(尹世紀)이고, 조부는 윤식(尹湜)이며, 부친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윤득경(尹得敬)이다. 외조부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송요좌(宋堯佐)이고, 처부는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양택(金陽澤)평택임씨(平澤林氏) 임달원(林達遠)이다.

1765년(영조 41) 식년시에서 진사 3등 4위로 입격하였다.

1793년(정조 17) 4월에 경사가 겹치고 조정과 민간이 편안하자 화기를 맞아들이고 하늘의 명을 이어가는 방도로서 막힌 자들을 소통하게하자는 차원에서 오랫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서용하였는데, 이때 지방 수령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 지평(持平) 이경명(李景溟)이 상소하여 정조의 실덕(失德)을 논하다가 대역죄로 처단당한 김하재(金夏材)의 매부인 윤문동(尹文東)을 지방관으로 추천한 전관의 삭직을 청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또한, 수찬(修撰)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여 그를 고을 수령에 추천한 전관의 삭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선왕의 뜻을 받들어 연좌의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라면 역적 이괄(李适)의 처남도 서용되었던 법이 있으므로 전관의 삭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영의정(領議政) 이병모(李秉模)가 마땅한 인재를 기용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거론하고, 임육(任焴) 등과 함께 그를 발탁할 것을 청하면서 서용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