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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악(朴宗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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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박상악(朴相岳)
자(字)여오(汝五)
호(號)창암(蒼巖)
시호(諡號)충헌(忠憲)
생년1735(영조 11)
졸년1795(정조 19)
시대조선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형원(朴亨源)
생부박흥원(朴興源)
조부박사정(朴師正)
외조부이모(李模)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종악(朴宗岳)
1735년(영조 11)∼1795년(정조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初名)은 상악(相岳), 자는 여오(汝五), 호는 창암(蒼巖).

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손자이고, 진사 박흥원(朴興源)의 아들이며, 모친은 종실(宗室)인 청릉군(靑陵君) 이모(李模)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박형원(朴亨源)에게 입양되었다.

1766년(영조 42) 사마시를 거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正言)교리(校理)승지 등을 거쳐 1776년(정조 즉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형 박종덕(朴宗德)홍국영(洪國榮)의 권세를 논척(論斥)하다가 오히려 삼사의 피소를 받아 파직되자, 이에 연좌되어 탄핵을 받고 기장현(機張縣)에 유배되었다.

그뒤 곧 유배에서 풀려나오기는 하였으나 10년 동안 등용되지 못하다가 1790년 특별히 발탁되어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같은해 6월 예조판서를 거쳐 외직으로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얼마 뒤 다시 피소를 받아 경기도관찰사에서 삭직을 당하여 파주목사에 보임되었다. 곧이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법성창(法聖倉)의 조운선(漕運船) 4척이 짐을 싣고 가라앉자, 이와 관련하여 추고(推考)를 받았다. 같은해 홍낙안(洪樂安)에 의하여 고발된 내포(內浦)의 천주교도 이존창(李存昌)을 공주감영에 가두고 공초(供招)를 담당하였다.

179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작은아버지 박명원(朴明源)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시파(時派)로 정조를 적극 보호하였기 때문에 그도 정조의 은총을 받았다.

같은해 궁속배(宮屬輩)들의 민간작폐가 늘자 이를 금하고 각 궁방의 무토면세(無土免稅)를 호조에서 일괄 수납하여 각 궁방에 분배하도록 상소하였다. 이어 경종을 모욕한 노론 윤구종(尹九宗)을 극률(極律)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내 세도(勢道)와 관계되어 일등 감등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동지정사(冬至正使)청나라에 다녀와 당전(唐錢)관계로 언관들의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794년 홍국영의 죄를 논하다가 전리(田里)에 방축(放逐)된 김종수(金鍾秀)를 신구하다가 의금부의 피소를 받아 충주목사에 부처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또한 차자(箚子)를 올려 노비법(奴婢法)의 폐단을 지적하고 노비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해 다시 진하정사(進賀正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潘南朴氏世譜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