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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극호(洪克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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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항(稚恒)
생년1731(영조 7)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홍순보(洪純輔)

[상세내용]

홍극호(洪克浩)
1731년(영조 7)~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치항(稚恒)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남도 온양(溫陽)이다.

증조부는 홍만조(洪萬朝)이고, 조부는 홍중징(洪重徵)이며, 부친은 홍순보(洪純輔)이다. 외조부는 목원광(睦元光)이다.

1768년(영조 4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83년(정조 7) 증광시에서 병과에 28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같은 해, 정조가 문‧무과에 급제한 자들을 불러 보았으나 시골에 있었으므로 전시(殿試)를 보지 못하였다. 관직은 지평(持平)‧장령(掌令)‧부사과(副司果) 등을 역임하였다.

1794년(정조 18) 장령을 역임하면서 대사간(大司諫) 이창한(李昌漢)과 함께 대각(臺閣)의 전계(傳啓) 올리는 일을 지체한 죄로 정조가 귀양을 명하였는데, 그 죄가 내시에게 있음이 드러나 용서하였다. 같은 해에 태묘(太廟)에서 대향(大享)을 실시하였는데, 공신위패(功臣位牌)를 내올 때 가시울타리를 쳐서 막으려 한 김종수(金鍾秀)에게 형벌을 적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 일로 삭직되었다. 1795년(정조 19) 부사과를 역임할 당시, 연등절에 장용영(壯勇營)에서 놀이를 한 것을 논하여 옥에서 죽은 정언(正言) 유성한(柳星漢)의 죄가 원통하다고 감싸준 이안묵(李安黙)‧이인묵(李寅黙) 형제에게 형벌을 내릴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집필자]

이후남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