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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득의(尹得毅)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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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홍(士弘)
생년1730(영조 6)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윤급(尹汲)

[상세내용]

윤득의(尹得毅)
1730년(영조 6)∼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사홍(士弘)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領議政)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이고, 고조는 윤면지(尹勉之)이며, 증조부는 윤계(尹堦)이고, 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윤세수(尹世綏)이다. 부친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용양위부사직(行龍驤衛副司直) 윤급(尹汲)과 모친 이만견(李晩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민통수(閔通洙)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식년시에서 진사에 합격하였다. 1772년(영조 48) 정시 을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경기어사(京畿御史)에 제수되어, 백성의 실정을 파악하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어사로의 임무를 완수하여 1773년(영조 49)에는 승지(承旨)에 발탁되었다.

1777년(정조 1)에 대사간(大司諫) 오재소(吳載紹)는 윤득의(尹得毅)가 죄인 신광수(申光綏)‧윤양후(尹養厚)와 연루되어 있으므로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향리로 쫓겨났다.

1781년(정조 5)에는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재직 중 관찰사(觀察使)와 실랑이 끝에 인장(印章)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보고되어 재차 변경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782년(정조 6)에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져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참고문헌]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인조, 정조)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