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유언호(兪彦鎬)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0C5B8D638B1730X0
자(字)사경(士京)
호(號)칙지헌(則止軒)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730(영조 6)
졸년1796(정조 20)
시대조선후기
본관기계(杞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직기(兪直基)
저서『칙지헌집』

[상세내용]

유언호(兪彦鎬)
1730년(영조 6)∼1796년(정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

우윤 유직기(兪直基)의 아들이다.

1761년(영조 37)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에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하여,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항소함으로써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해에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정치를 제거하는 것이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하였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여,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방송되었다. 이후 향리에 칩거하였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있다가 다음해 사망하였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하에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이 혁파되면서 개정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함으로써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하여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그는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하였으므로, 순조대에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明義錄
恩坡散稿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