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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소(吳載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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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극경(克卿)
호(號)석천(石泉)
시호(諡號)정헌(定獻)
생년1739(영조 15)
졸년1811(순조 11)
시대조선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원(吳瑗)
강릉최씨(江陵崔氏)
외조부최식(崔寔)

[상세내용]

오재소(吳載紹)
1739년(영조 15)∼1811년(순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극경(克卿), 호는 석천(石泉).

부친은 대제학 오원(吳瑗)이며, 모친은 강릉최씨(江陵崔氏)최식(崔寔)의 딸이다.

1767년(영조 43) 음보로 기용되어 장릉참봉(長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여 정릉참봉이 되었다.

1771년 사옹원봉사로 옮겼으나 그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

1773년 정식으로 정6품에 오르고 홍문관 관리가 되었다.

1775년 문신들이 행하는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숙마(熟馬)한필을 하사받았으며, 그해 승지에 올랐다.

1777년(정조 1) 찬집당상(纂輯堂上)이 되고 이어서 대사간에 올라 홍봉한(洪鳳漢)역변사건의 처리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801년(순조 1) 행부호군이 되고 천주학 배척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아경(亞卿)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해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정조실록』 편찬의 찬수당상에 임명되었으며, 1803년 다시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강화유수가 되어 외지로 나갔다. 임기가 끝나자 1806년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1807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09년 우참찬을 지낸 뒤 이듬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성격이 온후하여 모나지 아니하였고 남의 의사를 존중하여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공사를 처결함에 있어서는 대쪽같이 곧아서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키지 아니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淸選考
老洲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3-31문과방목과 사마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1729년(영조 5)에서 1739년(영조 15)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