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악(崔景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ACBDC545B1727X0 |
자(字) | 사앙(士仰) |
호(號) | 만성(晩醒) |
생년 | 1727(영조 3) |
졸년 | 1804(순조 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석전(崔錫佺) |
출신지 |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유등면(柳等面) 화탄(花灘) |
[상세내용]
최경악(崔景岳)
1727년(영조 3)∼1804년(순조 4).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사앙(士仰), 호는 만성(晩醒)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유등면(柳等面) 화탄(花灘) 출신이다.
부친은 최석전(崔錫佺)이다.
1759년(영조 2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직강(直講),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육조(六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와 통례(通禮),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 고원(高原), 평창(平昌), 갑산(甲山), 춘천(春川), 개성(開城)의 수령(守令)을 지냈다. 이후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와 육조의 참의(參議),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다. 정조 조에는 승지(承旨)로서 왕명을 받고 국화시(菊花詩)를 지어 올려 어제(御製) 병풍을 하사받았다.
그가 사헌부에 있을 때에, 첫째 성학(聖學)이 드러나는 사실이 없음이며, 둘째 상하(上下)가 신뢰하는 것이 부족함이고, 셋째 군신(君臣)이 일을 맡아 함에 실제가 없음, 넷째가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는 것이 부족함, 다섯째 생민(生民)을 보호하는 일의 실제가 없음, 여섯째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부족함, 일곱째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함이 부족하다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부친은 최석전(崔錫佺)이다.
1759년(영조 2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직강(直講),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육조(六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와 통례(通禮),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 고원(高原), 평창(平昌), 갑산(甲山), 춘천(春川), 개성(開城)의 수령(守令)을 지냈다. 이후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와 육조의 참의(參議),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다. 정조 조에는 승지(承旨)로서 왕명을 받고 국화시(菊花詩)를 지어 올려 어제(御製) 병풍을 하사받았다.
그가 사헌부에 있을 때에, 첫째 성학(聖學)이 드러나는 사실이 없음이며, 둘째 상하(上下)가 신뢰하는 것이 부족함이고, 셋째 군신(君臣)이 일을 맡아 함에 실제가 없음, 넷째가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는 것이 부족함, 다섯째 생민(生民)을 보호하는 일의 실제가 없음, 여섯째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부족함, 일곱째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함이 부족하다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송사집
순창군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정조실록
송사집
순창군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집필자]
김성수
대표명 | 최경악(崔景岳) |
성명 | 최경악(崔景岳) |
성명 : "최경악(崔景岳)"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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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