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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주(柳爾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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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귀만(歸晩)
호(號)귀만와(歸睌窩)
생년1726(영조 2)
졸년1797(정조 21)
시대조선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무신 > 무신
유영삼(柳榮三)
영천최씨(永川崔氏)
출생지경상북도 대구(大邱) 해안면(解顔面) 입석동(立石洞)

[상세내용]

유이주(柳爾胄)
1726년(영조 2)∼1797년(정조 21). 조선 후기 무신‧건축가. 호는 귀만(歸晩) 또는 귀만와(歸睌窩)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경상북도 대구(大邱) 해안면(解顔面) 입석동(立石洞)에서 태어났다.문화유씨(文化柳氏) 곤산군파(崑山君派) 30대 유영삼(柳榮三)영천최씨(永川崔氏)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사냥을 즐기는 등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개를 갖고 있었다.

17세에 서울로 올라가서, 1753년(영조 29)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755년(영조 31) 총융사(摠戎使) 홍봉한(洪鳳漢)영남의 무인(武人) 유이주(柳爾胄)조령(鳥嶺)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 보낸 일을 상세히 말하자 영조는 그를 불러 당시 상황을 말하게 하고, 그에게 병서(兵書)를 읽게 시킨 후 등용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그는 수어청파총(守禦廳把摠) 성기별장(城機別將)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

1773년(영조 49)에는 낙안(樂安)의 세선(稅船)이 부서져 조세가 제때에 올라오지 못하자 영조는 당시 낙안군수(樂安郡守)였던 그를 세미(稅米) 외에 다른 물품들을 함께 실어 배를 파손시킨 죄로 유배시켰다.

이듬해 풀려난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구례군(求禮郡) 문척면(文尺面) 월평으로 왔다가 다시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로 이주하였다. 그가 이주한 땅은 본래 지역의 토호(土豪)인 재령이씨(載寧李氏) 일가 소유였으며, 돌이 많고 척박하였으나 풍수지리로 볼 때 미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으로 전해내려 왔다. 유이주는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훗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반 주택으로 평가 받는 운조루(雲鳥樓)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등극하면서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장(五衛將)으로 관직에 복귀하고 함흥성(咸興城)을 쌓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상주영장(尙州營將)을 거쳐 1982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전직되었다.

그는 관직 생활 중 대규모 국가 건축공사를 맡아 진행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운조루를 설계하였으며, 공사는 그의 조카인 유덕호(柳德浩)가 맡았다. 운조루는 1776년(정조 즉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만인 1782년(정조 6) 유이주용천부사(龍川府使)로 있을 때 완성했다. 7년간의 공사 끝에 99칸의 주택이 완성되자 그는 저택에 일가친척들을 모아 함께 살도록 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유이주는 1775년(영조 51) 재령이씨와 혼인한 조카 유덕호를 양자로 들여 재령이씨(載寧李氏)와 인척관계를 맺게 되면서, 운조루의 집터 또한 완전하게 그들로부터 양여 받게 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구례운조루(국립민속박물관. 1988)
운조루(http://unjoru.com/)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