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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득부(尹得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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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휴(士休)
호(號)신재(信齋)
생년1723(경종 3)
졸년1799(정조 23)
시대조선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원(尹源)

[상세내용]

윤득부(尹得孚)
1723년(경종 3)∼1799년(정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사휴(士休), 호는 신재(信齋).

대제학을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후손으로 윤원(尹源)의 아들이다.

10대 소년기에 여러 경전에 능통하여 성균관에 있을 때 이미 명성이 높았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정조가 즉위하자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왕이 세손으로 있을 때 도움을 받은 바 있는 서명선(徐命善)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횡포가 지나치므로 상소하여 서명선의 죄상을 극론하였다.

이어 은산현령으로 나갔다가 곧 들어와서 수찬이 되자, 다시 서명선의 문제를 거론하고, 또 윤증(尹拯)의 복관(復官)이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풀려났다. 그는 유배에서 돌아왔으나 그에게 감정을 품은 자가 많아 편하게 지낼 수가 없었으므로, 양근(楊根)의 촌사(村舍)에 우거하였다.

1790년(정조 14) 특지(特旨)로써 경상도도사영해부사에 임명되고, 공조참의승지형조참판대사간대사성에 이어 예조참판좌유선(左諭善)에 이르렀다.

순조가 즉위하자 그의 사당에 사제(賜祭)하고 아들에게 음직(蔭職)을 내렸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臺山集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대표명윤득부(尹得孚)
득부(得孚)
성명윤득부(尹得孚)

명 : "득부(得孚)"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竹下日錄v5豈以得孚䟽而有所增减也日昨臣䓁之請討實以世道人心日就晦溺憂虞之端百倍於前更不可一味暇豫也何甞以株連於得孚勒成於濟恭耶噫有逆必討天下之大義理也此而少忽則臣不得為臣國不得為國殿下何不念及於此今以十行之辭教欲制
竹下日錄v5逆之律者臣䓁不能無憾於聖教之下也惟彼尹得孚䟽事藉曰非濟恭之指使顧其叚落形跡自歸相聯至於濟恭之罪案豈以得孚䟽而有所增减也日昨臣䓁之請討實以世道人心日就晦溺憂虞之端百倍於前更不可一味暇豫也何甞以株連於得孚勒成
竹下日錄v6出今又有李魯春伸捄尹得孚之䟽矣得孚營護凶逆力抗大論首被夏賊之所扶奬所汲引則及夫夏賊之變出治黨之律冝先得孚而魯春乃敢投進一䟽滿紙阿護托以自明之章潜售立脚之計此猶不足掇拾凶賊之口氣要爲網打國邊之計其心所在將欲
蓬壺日記v2群下憤冤之情常以爲天理昭著則終有自綻之時乃者魯春以初攻尹得孚之人忽於夏賊作逆之後以前應敎投疏自劾反救得孚掇拾夏賊之凶言肆然無忌憚之意究厥心腸與夏賊一而二二而一也殿下過推好生之德自南間而移置馬房自保放而遽命
國朝人物志v3字稚恒海平人文貞公根壽七世孫諭善得孚子辛酉文科以校理兼正廟實錄記事宮癸亥論劾趙德隣乙亥出牧濟州治行爲近世第一入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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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