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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규(安宗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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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창(士昌)
생년1723(경종 3)
졸년1778(정조 2)
시대조선후기
본관죽산(竹山[舊])
활동분야무신
안윤복(安允福)

[상세내용]

안종규(安宗奎)
1723년(경종 3)~1778년(정조 2).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사창(士昌). 본관은 죽산(竹山[舊])이고, 거주지는 경(京; 서울)이다.

부친은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訓鍊院都正) 안윤복(安允福)이다.

1751년(영조 27) 신미(辛未)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한 후, 1774년(영조 50) 등준시 무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양주목사(楊州牧使)‧제주목사(濟州牧使)‧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관성장(官城將)‧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769년(영조 45) 제주목사 시절 심한 가뭄으로 고을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호남 연해에 있는 곡식 1만 석을 제주로 옮겨줄 것을 조정에 청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등의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71년(영조 47)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시절 업무 처리는 잘하지만 뇌물을 받고 곤장을 남발하는 등의 행실로 파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임금의 은혜로 무사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뇌물을 받고 곤장을 남발하고 선정(先正)의 문집을 함부로 보관하여 곰팡이가 피게 하는 등의 행실을 넘어 정후겸(鄭厚謙)과 윤태연(尹泰淵)에게 아부를 하다가 그들 무리가 제거되는 날 아무나 붙잡고 살려달라며 애걸을 하였다가 유배되었다. 그러나 업무적인 능력의 탁월함이 인정되어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임용되었다.

[참고문헌]

丙戌後三百九年甲午再登俊試榜
英祖實錄
正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