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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상(鄭一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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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초(聖初)
생년1721(경종 1)
졸년1792(정조 16)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정일상(鄭一祥)
1721년(경종 1)∼1792년(정조 1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성초(聖初)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증조부는 정재후(鄭載厚)이고, 조부는 정제선(鄭濟先)이다. 부친 판서 정형복(鄭亨復)과 모친 민항(閔恒)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부는 연안이씨 이성(李渻), 청송심씨 심석주(沈錫舟), 광주이씨 이동연(李東淵)이다.

1774년(영조 50)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승지‧호조참판‧비변사당상‧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청나라에서 전임 진주사(陳奏使)가 가지고 간 주문(奏文) 내용의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 사은(謝恩) 겸 진주사(兼陳奏使)를 보냈는데 이때 부사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3년(정조 7) 종부시제조 재직 시절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팔고조도(八高祖圖)』 등을 간행하였는데 『선원계보』에 정안옹주(貞安翁主)부터 정화옹주(貞和翁主)까지를 실수로 다음 항렬에 잘못 기록하였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해 다시 복직되어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사헌부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84년(정조 8) 이때 어제시(御製詩)를 태묘(太廟)의 망묘루(望廟樓)에 걸었는데, 배종(陪從)하여 받들 즈음에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의정 김익(金熤)이 파면하기를 청하여 호조판서에서 파직되었다가 곧 유임되었으며, 도감도제조(都監都提調)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어 영접도감제조(迎接都監提調),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올랐다.

1785년(정조 9) 지경연사(知經筵事), 다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86년(정조 10) 의정부좌참찬,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 하였다. 1789년(정조13) 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혜영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9-26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졸년, 처부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