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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관지(沈觀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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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빈(士賓)
생년1720(숙종 46)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송(靑松)
활동분야문신
심계(沈銈)

[상세내용]

심관지(沈觀之)
1720년(숙종 46)~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빈(士賓)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증조부는 심속(沈涑)이고, 조부는 심택현(沈宅賢)이며, 부친은 심계(沈銈)이다. 외조부는 김흥경(金興慶)이고, 처부는 권혁(權爀)이다.

1764년(영조 40) 정시에 을과 1위로 문과 급제하였으며, 1767년(영조 43) 중시에서도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헌납(獻納)‧교리(校理)‧수찬(修撰)‧장령(掌令)‧옥강만호(玉江萬戶)‧필선(弼善)‧보덕(輔德)‧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69년(영조 45) 조참에 늦게 참석한 정창순(鄭昌順)‧이양수(李養遂)‧이익선(李益烍)과 함께 북관(北關)에 유배되었다가 바로 용서를 받았다. 1770년(영조 46) 전이조낭관(前吏曹郎官) 최익남(崔益男)이 동궁에게 사도세자의 성묘(省墓)를 금하게 한 일을 거두어달라며 상소를 올렸을 때, 현직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상소를 올린 것은 잘못이며, 동궁이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이 깊다며 사도세자의 성묘를 금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1774년(영조 50) 대사헌 정창성(鄭昌聖)이 상참(常參)에 참석하지 않은 죄를 물어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같은 해에 영조는 하지도 않은 말로 자신을 인책(引責)하려 한 계책을 괘씸하게 여겨 간삭(刊削)하도록 하였으나, 다시 임용하였다.

1799년(정조 23) 정언 서욱수(徐郁修)로부터 시정배(市井輩)처럼 글도 행실도 없는 사람이 문과에 급제한 후부터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洪麟漢) 등에게 아부를 하면서 시전(市廛) 상인들의 물건을 강탈하고, 훈랑(訓郞) 재임 시절에는 공적 재물을 훔치기도 하였다며,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였으나 임금의 윤허가 없어서 유배되지 않고, 도리어 서욱수가 삭탈관직 된 일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英祖實錄
正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