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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양(趙宜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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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의경(義卿)
호(號)오죽재(梧竹齋)
생년1719(숙종 45)
졸년1808(순조 8)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양(漢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조의양(趙宜陽)
1719년(숙종 45) 4월 9일∼1808년(순조 8) 5월 27일. 조선 중기 문신‧유학자‧문장가. 자는 의경(義卿)이고, 호는 오죽재(梧竹齋)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감천면(甘泉面)이다.

증조부는 조명한(趙鳴漢)이고, 조부는 조봉징(趙鳳徵)이다. 부친 조원익(趙元益)과 모친 의성이씨(宣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이유룡(李猶龍)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이광정(李光庭)의 문하에 나아가 경사(經史)에 대해 강론하고 변증하였으며, 이수연(李守淵)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하면서 학문이 더욱 진보하였다.

20대에 여러 차례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1771년(영조 47) 식년시 생원 3등 19위로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축하하는 경과별시(慶科別試)에 응시하였다가 정조(正祖)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고, 1807년(순조 7)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간옹(艮翁) 이몽서(李夢瑞)와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와설(臥雪) 이상경(李尙慶)‧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남병(南屛) 정박(鄭璞) 등과 시회(詩會)를 가지며 교유하였다.

향산동(香山洞) 봉황성(鳳凰城) 아래에 남덕대(覽德臺)를 세우고, 자호인 ‘오죽재’로 편액하여 걸어 두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석시(趙錫時)‧조석양(趙錫良)이다.

묘는 예천군 감천면에 있다.

저서로 『오죽재집(梧竹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司馬榜目
承政院日記
梧竹齋集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