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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趙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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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서(明瑞)
호(號)영호(永湖)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719(숙종 45)
졸년1777(정조 1)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상경(趙商絅)
저서『해사일기』

[상세내용]

조엄(趙曮)
1719년(숙종 45)∼1777년(정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충청도암행어사를 거쳐,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매, 도내(道內) 시노비(寺奴婢) 1만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蠲减)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 전세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고, 중앙으로 벼슬이 옮겨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참판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으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인하여 탐학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서용되었지만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하였다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면서 이어 일단 벗겨졌던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혐의가 새삼 문제가 되어 탐재학민(貪財虐民)한 부패관리(贓吏)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나고 민생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은데, 특히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지역에까지 통하게 함으로써 세곡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던 점과,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함으로써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하였던 점〔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1794년(정조 18) 좌의정 김이소(金履素)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覈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純祖實錄
海槎日記
雲石遺鎬
甘藷傳播考(孫晉泰, 震檀學報 13, 1941)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