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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徐命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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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군수(君受)
호(號)보만재(保晩齋)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716(숙종 42)
졸년1787(정조 11)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종옥(徐宗玉)
5대조서성(徐渻)
저서『보만재집』
저서『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저서『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상세내용]

서명응(徐命膺)
1716년(숙종 42)∼1787년(정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의 아들이며,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형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뒤 대제학을 거쳐 상신(相臣)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그는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는 절대적인 찬획(贊劃)을 끼쳤다.

그는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그의 학문정신은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는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계몽도설(啓蒙圖說)』 등의 역서류,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기사경회력(耆社慶會曆)』『기자외기(箕子外紀)』『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양한사명(兩漢詞命)』 등의 사서류, 『고사신서(攷事新書)』의 유서(類書) 등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저술로는 『보만재집』『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등을 남겼다.

이 저술들은 사후에 서호수서유구 등에 의해 정리된 것인데, 보만재총서는 정조로부터 “우리 동쪽에서 400년간에 이런 거편(鉅篇)이 없었다.”는 평을 받았으며, 『보만재잉간』은 총서를 편집하고 남은 것을 따로 모은 것이다. 『보만재총서』는 일종의 유서로서 『고사신서』와 함께 그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의 학문정신을 대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