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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한(洪鳳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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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익여(翼汝)
호(號)익익재(翼翼齋)
시호(諡號)익정(翼靖)
생년1713(숙종 39)
졸년1778(정조 2)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현보(洪鉉輔)
조부홍중기(洪重箕)

[상세내용]

홍봉한(洪鳳漢)
1713년(숙종 39)∼1778년(정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홍중기(洪重箕)의 손자로, 홍현보(洪鉉輔)의 아들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이듬해 비변사 당상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靉陽栅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었다.

1761년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뒤를 이어 우의정에 발탁되고, 그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문제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좌의정으로 복직된 후,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時務六條)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고,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하여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재차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에는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그곳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였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있던 중, 반대세력의 활동에 의하여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恩信君) 진(禛)은언군(恩彦君) 인(䄄)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世孫: 뒤의 정조)까지 그 권위가 위협당하게 되었을 때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으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라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영조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친정 인물인 김구주(金龜柱) 세력과 권력을 다투어, 영조대 중반 이후 김구주 중심의 남당(南黨)에 대립하였던 북당(北黨)의 중심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 노론‧소론 대립의 여진 속에서 1762년 영조의 명령으로 세자가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때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하여 후일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세자에 대한 처분을 뉘우치자, 그 사건을 초래하게 한 김구주 일파를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은 「수의편(垂義篇)」을 찬술하여 반대파를 배격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정조 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정파대립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그를 공격하는가 또는 두둔하는가의 여부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를 구분하는 한 기준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영조를 도와 조선 중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국정 운영에 대한 주장을 정조가 친히 편찬한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가 있으며, 그밖에 『정사휘감(正史彙鑑)』『익익재만록』 등이 있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恩坡散稿
한중록
正祖年間 時僻黨爭論에 대한 재검토(朴光用, 한국문화 11, 1990)

[집필자]

유승주(柳承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