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유광익(柳光翼)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0AD11C775B1713X0
자(字)사휘(士輝)
호(號)항재(恒齋)
생년1713(숙종 39)
졸년1780(정조 4)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춘(柳春)
저서『강학제요(講學提要)』
저서『동사편년(東史編年)』
저서『경현신편(景賢新編)』
저서『풍암집화(楓巖輯話)』

[상세내용]

유광익(柳光翼)
1713년(숙종 39)∼1780년(정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휘(士輝), 호는 풍암(楓巖) 또는 항재(恒齋). 동지중추부사 유춘(柳春)의 아들이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의 연마에 힘썼다. 『심경주해(心經註解)』를 보완하여 사칠호발(四七互發)의 서(書)를 지음으로써 사우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자 서울 남쪽에 서재를 짓고 강의의 격식을 세웠다.

30세에 이미 학자들이 ‘항재선생(恒齋先生)’이라 칭하였다. 『대학』에 침잠하여 『대학집석(大學輯釋)』을 저술하였다. 이름이 알려져 1760년(영조 3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으며, 1764년 서부도사(西部都事)로 임명된 뒤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767년에는 예빈시주부를 거쳐 고산현감이 되었다.

고산현감으로 재임할 때에는 자신이 농사의 이치를 알고 있다면서 임금을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가 관찰사와 조정을 기만한다고 하여 체차당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사복시주부지례현감이 되었다가 1772년 벼슬에서 물러나 직산으로 퇴거하였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에 익위사에 있으면서 동궁을 모신 바 있다.

정통성리학에 몰두하였으며,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체계화하였다. 『강학제요(講學提要)』『동사편년(東史編年)』『경현신편(景賢新編)』『풍암집화(楓巖輯話)』 등의 저술을 남겼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耳溪集(洪良浩)

[집필자]

정선남(鄭善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