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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검(黃仁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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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득(敬得)
시호(諡號)정효(貞孝)
생년1711(숙종 37)
졸년1765(영조 41)
시대조선후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자(黃梓)

[상세내용]

황인검(黃仁儉)
1711년(숙종 37)∼1765년(영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득(敬得).

호조참판 황자(黃梓)의 아들이며, 창성위(昌城尉: 영조의 10女壻) 황인점(黃仁點)의 형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유학(幼學)으로 반제(泮製)에 수석하여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춘추관의 한림에 적합한 자로 뽑히고 설서가 된 뒤 겸설서정언을 거쳐, 1753년에는 문학에 이어 지평겸문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에 수석하고 헌납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실록청찬집낭청(實錄廳纂輯郞廳)을 거쳐 1756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1758년에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이조참의를 거쳐 1760년 대사헌이 된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1762년 우유선(右諭善)대사간이조참판유선좌부빈객에 이어 빈객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좌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예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왕세자 책봉칙지(冊封勅旨)를 가져오는 사행을 맞기 위하여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서 한성부판윤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65년 병조판서홍문관제학에 이어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병사하였다.

청렴결백한 관료생활로 가정이 몹시 빈한하였으므로 영조는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부의를 후히 내리도록 명하는 한편, 치제문(致祭文)과 함께 정효(貞孝)의 시호를 내렸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恩坡遺稿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대표명황인검(黃仁儉)
인검(仁儉)
성명황인검(黃仁儉)
경득(景得)

성명 : "황인검(黃仁儉)"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勅使日記v12如爲白乎旀此外事件俱載于儐臣道臣狀啓中不復煩陳緣由馳啓爲白臥乎事啓下迎接都監同日平安監司鄭弘淳遠接使黃仁儉成貼狀啓勅行馬轉站止宿之由旣已馳啓爲白有在果宿站入送是白在差備譯官金振夏等當日丑時還渡江出來所告內勅
勅使日記v12給爲白乎旀他餘事情具載于儐臣道臣狀啓中不復煩陳緣由馳啓爲白臥乎事啓下迎接都監同日平安監司鄭弘淳遠接使黃仁儉狀啓勅行馬轉站止宿之由朝已馳啓爲白有在果乘轎一事彼雖不許其在迎接之道宜示敬懃之意是白乎等以以雙轎使之
勅使日記v12使所到處以沿路除弊之意措辭致謝而軒架儺禮旣已除減則儺禮郞廳依例減下何如傳曰允同日平安監司鄭弘淳遠接使黃仁儉狀啓勅行昨日良策站止宿之由已爲馳啓爲白有在果勅行卯時量良策站離發鐵山府中火酉時到宣川府茶啖飯奉無弊支
郯述v02十月本館圈點三點二人六點六人以不爲廣取因 傳敎館閣會圈十一月館閣會圈三點黃仁儉尹得養二點十四人
郯述v04領相洪鳳漢右相金相福主文李鼎輔左參贊洪啓禧吏判黃仁儉吏參李溵吏議沈履之○畐副學李最中應敎洪樂純本館錄柳善養李得一二人未參姜潤李性源二人加入
和吉翁主嘉禮謄錄鄭弘淳參判金善行 兵曹判書具允明參判元仁孫刑曹判書黃仁儉工曹判書李泰和參判金尙重 以上進有頉秩左議政金 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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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