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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행(朴敬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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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칙(仁則)
생년1710(숙종 36)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무안(務安)
활동분야문신
박도욱(朴道郁)

[상세내용]

박경행(朴敬行)
1710년(숙종 36)~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인칙(仁則)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박재흥(朴再興)이고, 조부는 박성서(朴星瑞)이며, 부친은 박도욱(朴道郁)이다. 외조부는 박유년(朴有年)이고, 처부는 최후창(崔後昌)‧김종표(金宗杓)이다.

1733년(영조 9) 식년시에 진사 3등 2위로 합격하였으며, 1742년(영조 18) 정시에 병과 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흥해부사(興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영조 20) 영조가 모화관(慕華館)에 거동하여 세마대(洗馬臺)에서 무과의 일종인 관무재(觀武才)를 시행하였다. 이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다.(浴沂風舞雩)”는 것을 시제로 하여 문관들에게 정시(庭試)를 치르게 하였는데, 이때 으뜸을 차지하여 6품으로 품계가 높여졌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은 정언(正言) 김광국(金光國)이 상소하여 여항인(閭巷人)의 이름을 사대부들 위에 두는 것은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대각(臺閣)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8년(영조 24)에는 무진통신사행(戊辰通信使行) 일원으로 이봉환(李鳳煥) 등과 일본에 다녀왔다. 그런데 1770년(영조 46)에 최일남(崔一男)이 이봉환이 스스로를 유자광(柳子光)이라 자처하며 역모를 꾀하였고 밀고하여 경인옥사(庚寅獄死)를 일으켰다. 박경행은 이때 이봉환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것으로 연루되어 흥해(興海) 임소에서 체포되었으며, 국문을 받고 단천(端川)에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