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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휘량(鄭翬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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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서(士瑞)
호(號)남애(南崖)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706(숙종 32)
졸년1762(영조 38)
시대조선후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수기(鄭壽期)
저서『남애집』
저서『견사록(見思錄)』

[상세내용]

정휘량(鄭翬良)
1706년(숙종 32)∼1762년(영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우(子羽) 또는 사서(士瑞), 호는 남애(南崖). 판돈녕부사 정수기(鄭壽期)의 아들로, 당시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의 동생이다.

1733년(영조 9) 사마시를 거쳐 173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독관(侍讀官)응교를 지냈다.

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찬집당상(纂輯堂上)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학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그뒤 호조공조이조병조판서를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61년 우의정이 되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당시 왕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여,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의 죄를 탄핵, 조태구유봉휘는 노적(奴籍)으로 떨어뜨리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도 추탈(追奪)되게 한 다음, 사직하여 영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직하였다.

정치달(鄭致達)의 숙부로서 안으로 정치달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도움이 많았으며, 은밀히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의 일당과 통하여 무진‧기사 연간에 사설(辭說)을 일으켰다.

이들 형제는 모두 조현명(趙顯命)의 배경으로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며, 또 대제학을 역임하여 문명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남애집』『견사록(見思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