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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중(李德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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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이(子彛)
호(號)결재(潔齋)
생년1702(숙종 28)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병겸(李秉謙)

[상세내용]

이덕중(李德重)
1702년(숙종 28)∼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이(子彛), 호는 결재(潔齋). 이병겸(李秉謙)의 아들이다.

1730년(영조 6) 경술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여러 차례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그뒤 홍문관부교리사간원헌납을 역임하였으며, 1739년 밀양군(密陽君) 이완(李梡)진위사 겸 사은사(陳慰使兼謝恩使)청나라에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승지홍문관부제학대사간이조참의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이천기(李天紀) 등과 함께 혈당(血黨)을 이루어 주무(綢繆)를 하고 재물을 물쓰듯한다는 혐의로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무사하였다.

1734년 회천(回薦) 때에 조명경(曺命敬)의 피천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검열직이 삭제되었다.

그뒤 관직이 삭탈되어 있던 중 1735년 소를 올려 영조가 사초(史草)를 열람하고 불사르게 한 것에 대하여 그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는 등의 강직함을 보였다.

또, 1739년 정언 홍계희(洪啓禧)의 소가 못마땅하다 하여 해남에 유배시키려 하자, 그 부당함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진도에 유배될 뻔하였으나, 승지 구택규(具宅奎)의 도움으로 중추(重推)로 감형되었다가 1740년 응교로 복직되었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집필자]

최진옥(崔珍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