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채(曺命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BA85CC44B1700X0 |
자(字) | 주경(疇卿) |
호(號) | 난재(蘭齋) |
생년 | 1700(숙종 26) |
졸년 | 1764(영조 4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하성(曺夏盛) |
[상세내용]
조명채(曺命采)
1700년(숙종 26)∼1764년(영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주경(疇卿), 호는 난재(蘭齋). 조하성(曺夏盛)의 아들이다.
1736년(영조 12)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후 정언‧지평‧승지‧판윤‧이조참판‧대사헌 등 중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1755년 예조참판이 되어 북도에 거주하고 있는 향화인(向化人)자손들의 성관(姓貫)을 사출(查出)하여 성책(成冊)하여야 할 중요한 사명을 맡았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사건 때에는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였다가 곧 풀려났으나 2년 뒤에 죽었다.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공로로 국록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1736년(영조 12)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후 정언‧지평‧승지‧판윤‧이조참판‧대사헌 등 중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1755년 예조참판이 되어 북도에 거주하고 있는 향화인(向化人)자손들의 성관(姓貫)을 사출(查出)하여 성책(成冊)하여야 할 중요한 사명을 맡았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사건 때에는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였다가 곧 풀려났으나 2년 뒤에 죽었다.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공로로 국록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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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조정기(趙楨基)
명 : "명채(命采)"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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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