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관(任守寬)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C218AD00B1696X0 |
자(字) | 중률(仲栗) |
생년 | 1696(숙종 22) |
졸년 | 1762(영조 38)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풍천(豊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임수관(任守寬)
1696년(숙종 22)∼1762년(영조 3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률(仲栗)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임량(任量)이고, 부친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임순원(任舜元)이며, 모친은 판관 윤주(尹湊)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생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임달원(任達元)과 생모 지평(持平) 홍억(洪億)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공조좌랑(工曹佐郞) 남수만(南受萬)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시 진사과 2등 7위로 합격하였다.
40살에 처음으로 출사하여 태릉참봉(泰陵參奉)‧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刑曹佐郞)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에 걸려 사직하였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동부도사(東部都事)로 복직되어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를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공릉령(恭陵令)에 올랐다.
그 뒤 다시 외직으로 창녕(昌寧)‧대흥(大興)‧양근(楊根)으로 나가 이서(吏胥)를 단속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풀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지방관으로 재직 중 병을 핑계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고(誣告)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임선(任珗)‧임진(任瑱)‧임탁(任琸)‧임빈(任璸)‧임현(任玹)이다.
조부는 임량(任量)이고, 부친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임순원(任舜元)이며, 모친은 판관 윤주(尹湊)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생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임달원(任達元)과 생모 지평(持平) 홍억(洪億)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공조좌랑(工曹佐郞) 남수만(南受萬)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시 진사과 2등 7위로 합격하였다.
40살에 처음으로 출사하여 태릉참봉(泰陵參奉)‧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刑曹佐郞)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에 걸려 사직하였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동부도사(東部都事)로 복직되어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를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공릉령(恭陵令)에 올랐다.
그 뒤 다시 외직으로 창녕(昌寧)‧대흥(大興)‧양근(楊根)으로 나가 이서(吏胥)를 단속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풀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지방관으로 재직 중 병을 핑계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고(誣告)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임선(任珗)‧임진(任瑱)‧임탁(任琸)‧임빈(任璸)‧임현(任玹)이다.
[참고문헌]
在澗集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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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