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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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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금(李昑)
자(字)광숙(光叔)
호(號)양성헌(養性軒)
생년1694(숙종 20)
졸년1776(영조 52)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崔氏)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처부서종제(徐宗悌)
처부김한구(金漢耉)
묘소원릉(元陵)
저서『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
저서『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
저서『어제경세편(御製警世編)』
저서『백행원(白行源)』
저서『어제소학지남(御製小學指南)』
저서『팔순유곤록(八旬裕崑錄)』
저서『어제조손동보(御製祖孫同譜)』
저서『어제효제권유문(御製孝悌勸諭文)』

[상세내용]

영조(英祖)
1694년(숙종 20)∼1776년(영조 52).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5년∼1776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1. 가계와 왕세제 책봉
부친은 숙종이고, 모친은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하여지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21년 숙종에 이어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그해 노론측 정언 이정소(李廷熽)경종에게 후계자를 먼저 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은 숙종의 제2계비 김대비(金大妃: 仁元王后)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들 노론측은 경종이 병환이 많고 효종현종숙종의 3대에 해당하는 혈통(三宗血脈)은 경종을 제하고는 왕제(王弟)인 연잉군밖에 없음을 들어 왕제를 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왕제의 세제책봉으로 기울어지자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리고 소론측인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비롯, 사간 유봉휘(柳鳳輝) 등도 시기상조론을 들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노론측 대세에 밀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2. 대리청정 문제와 노론 소론 대립
이제 왕세제로 기반을 다지게 된 노론의 입장에서는 좀더 실권을 잡기 위해서 대리청정(代理聽政)까지 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먼저 노론측은 집의 조성복(趙聖復)을 앞세워 왕세제의 대리청정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주장하게 하였다. 그의 주장은 경종이 병이 많고, 또 1717년(숙종 43)에 숙종경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정유고사(丁酉故事)를 들어 왕세제에게도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경종은 노론측 주장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일단 허락하였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崔錫恒), 우의정 조태구 등이 읍간으로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어 중앙조정은 물론 지방의 감사‧수령‧찰방성균관학생 및 각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청정명령을 받은 왕세제도 네번이나 청정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그러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정청(庭請)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자신의 명분을 세운다는 입장에서 “나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그러자 노론측 여러 중신들은 대리청정이 굳어진 것으로 판단,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정청의식을 파하였다. 이어 노론측은 연명으로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숙종 말년의 정유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箚書)를 급히 올렸다.

노론측의 태도가 이와같이 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일의 해결을 다시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정유청정은 숙종이 춘추가 높은 데다가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나 지금 왕세제의 대리청정 주장은 전하(殿下: 경종)의 보령이 겨우 34세이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전하의 병환과는 형세가 판연히 다르므로 청정명령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대신들도 다른 명분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노론의 입장에서는 전번에 올린 대리청정을 허락하여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 차서가 잘못임을 인정, 또다시 청정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정청을 베풀고, 이어 다시 연명 차서로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결국, 환수의 요청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노론측의 태도 변화는 신하로서 일관된 명분을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또 그들에게 가장 큰 입지를 마련하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3. 신축옥사 임인옥사
결국 1721년 기회를 잡은 소론들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주도하였다.

이듬해 기세를 몰아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은 남인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소론측은 노론이 삼수역(三守逆: 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세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왕세제도 이 모역에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들은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명도 유배 또는 치죄를 하는 대대적인 노론 축출을 단행하였다.

이때 임인옥안에 왕세제의 혐의도 함께 기록되었다. 이무렵 김일경 등은 또 내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를 보필하던 장세상(張世相)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왕세제가 형인 경종에게 문안하러 가는 것조차 막았다.

왕세제는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노론이 축출되고 신변에 위협까지 받게 되자 계모인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였다. 김대비는 이러한 정국(政局)을 깊이 인식,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으므로 왕세제의 간절한 사정까지 담은 언교(諺敎)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반발을 누그러뜨렸다.

1724년 경종이 죽자 영조는 무사히 등극하게 되었다.
4. 즉위 후의 탕평책
노론‧소론의 당론에 처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뒤 1724년에 즉위한 영조는 바로 탕평정국의 서곡인 붕당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영조가 탕평책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제로 책봉된 뒤부터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왕세제로 책봉된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노론‧소론의 당론이 심화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거기에 휘말렸으며, 그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내 강경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은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등 또다시 노론‧소론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에는 노론내 준론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론‧소론내 탕평세력을 고르게 등용, 초기의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때 인사정책으로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洪致中)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李台佐)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金在魯)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宋寅命), 참의에 소론 서종옥(徐宗玉), 전랑에 노론 신만(申晩)으로 상대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그뒤 영조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게 되자 기초를 다진 왕권으로 쌍거호대의 방식을 극복,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정국이 본궤도에 오르자 이의 정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그 기반을 강화시켜나갔다. 이러한 정국구도에 따라 노론‧소론‧남인‧소북 등 사색을 고르게 등용, 탕평정국을 확대시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위 후 을사처분으로 노론을 불러들여 왕위정통성 확보와 탕평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는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측의 반발세력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었고,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 나주에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토역과(討逆科)를 보일 때 그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남인과 노론 명분 속에 미약한 권력을 유지하여 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노론측 김한구홍계희(洪啓禧) 등이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하여 장헌세자의 비행(祕行)과 난행(亂行)을 고발하게 하여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5. 형률의 완화
한편,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신중을 기하게 하였으며,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시켰다.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6. 경제정책
또한 영조는 경제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725년 각 도의 제언(堤堰)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액을 초과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과세를 시켰다.

한편 오가작통(五家作統) 및 이정(里定)의 법을 엄수하게 하여 탈세방지에 힘썼다.

그런데 영조 재위 때에 그가 시행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이었다. 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良役)의 불균형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군역(軍役)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균역법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영조는 우선 조현명(趙顯命) 등에게 「양역사정(良役查正)」을 올리게 하는 한편, 1750년에는 친히 홍화문에 나가 오부방민(五部坊民)을 만나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집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균역법 시행의 가장 큰 의의는 어느 정도 전국적인 양정수(良丁數)의 파악이 실제로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실제 파악작업은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시도된 것으로 왕권과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군역문제 해결에 있어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還穀分類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趙曮)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7. 사회정책
한편, 사회정책을 실시, 신분에 따른 역(役)을 더욱 명백히 하였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였다.

1730년에 양처(良妻)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서얼차대(庶孽差待)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 의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서자도 관리로 등용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영조는 그의 생전의 신념으로 이끌었던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켰다.

또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蕩平科)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해는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8. 국방정책
영조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1729년에는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고치게 하였으며, 이듬해는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제조한 해골선(海鶻船)을 통영(統營) 및 각 도의 수영(水營)에서 만들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떨쳤던 해군력을 계승,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북방 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727년에는 북관군병(北關軍兵)에게 총을 복습하게 하였고, 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 완성하였다.
9. 문화진흥정책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 『감란록(勘亂錄)』을 반사(頒賜)하고 이듬해 『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시켰다.

1732년 이황(李滉)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修明)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女四書)』를 언역(諺譯)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42년에 『천문도(天文圖)』『오층륜도(五層輪圖)』를 모성(模成)시켰으며, 이듬해에는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1754년 『소학훈의(小學訓義)』『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였고, 『경국대전』을 수명한 뒤 새로이 제도적으로 바뀐 것을 반영하여 『속대전』을 만들었다.

1747년 『황단의궤(皇壇儀軌)』를 편찬한 뒤 이듬해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無寃錄)』을 필삭, 훈석을 가하게 하여 각 도에 반포하게 하였다.

1749년에는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1753년 『누주통의(漏籌通義)』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이룩, 이를 내외에 반포하였다.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三國基址圖)』『팔도분도첩(八道分圖帖)』『계주윤음(戒酒綸音)』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년 『해동악장(海東樂章)』을 만들고, 『여지도서(輿地圖書)』를 인간(印刊)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한편 177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또한, 영조가 여러 권의 책을 친제(親製)하기도 하였다. 악서(樂書)의 전범(典範)인 『악학궤범』의 서문을 지었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본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을 지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무신들을 위하여 『위장필람(爲將必覽)』을 저술, 이를 무신들에게 인반(印頒)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어제경세편(御製警世編)』『백행원(白行源)』『어제소학지남(御製小學指南)』『팔순유곤록(八旬裕崑錄)』『어제조손동보(御製祖孫同譜)』『어제효제권유문(御製孝悌勸諭文)』 등이 있다. 이 당시 재야에서 실학(實學)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洪大容)『연행록(燕行錄)』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磻溪隨錄)』이 간행되었다.

또한 신경준(申景濬)『도로고(道路考)』도 1770년에 편찬되었다. 영조는 친히 호학하였기 때문에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당론에 휘말려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로운 탕평정국으로 이끌어나가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英主)였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璿源系譜
國朝寶鑑
燃藜室記述
增補文獻備考
大東史
黨議通略
均役事實
壬亂以後의 良役과 均役法의 成立(車文燮, 史學硏究 10‧11, 1961)
英祖代 初半의 蕩平策과 蕩平派의 活動(鄭萬祚, 震檀學報 56, 1983)
18세기 老論과 一黨專制의 成立過程―辛壬士禍와 闡義昭鑑의 論理를 中心으로―(李銀順, 歷史學報 110, 1986)
英祖代 中半의 政局과 蕩平策의 再定立(鄭萬祚, 歷史學報 111, 1986)

[집필자]

송찬식(宋讚植)
대표명영조(英祖)
금(昑)
묘호영묘(英廟), 영조(英祖), 영조대왕(英祖大王), 영조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㓛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綂景暦洪休), 영종(英宗),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종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 영종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
봉호연잉군(延礽君)
광숙(光叔)
양성헌(養性軒)

묘호 : "영조(英祖)"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宗列傳一第五十三肅宗列傳二第五十四景宗紀事第五十五景宗配享相臣文衡将臣列傳第五十六英祖紀事一第五十七英祖紀事二第五十八英祖配享相臣文衡将臣湖堂第五十九英祖列傳一第六十英祖列傳二莊祖配享第六十一正祖紀事第六
紀年便攷v1将臣列傳第五十六英祖紀事一第五十七英祖紀事二第五十八英祖配享相臣文衡将臣湖堂第五十九英祖列傳一第六十英祖列傳二莊祖配享第六十一正祖紀事第六十二正祖配享相臣文衡将臣閣臣列傳一第六十三正祖列傳二第六十四純祖紀
紀年便攷v1将臣湖堂第五十二肅宗列傳一第五十三肅宗列傳二第五十四景宗紀事第五十五景宗配享相臣文衡将臣列傳第五十六英祖紀事一第五十七英祖紀事二第五十八英祖配享相臣文衡将臣湖堂第五十九英祖列傳一第六十英祖列傳二莊祖配享第
紀年便攷v1景宗配享相臣文衡将臣列傳第五十六英祖紀事一第五十七英祖紀事二第五十八英祖配享相臣文衡将臣湖堂第五十九英祖列傳一第六十英祖列傳二莊祖配享第六十一正祖紀事第六十二正祖配享相臣文衡将臣閣臣列傳一第六十三正祖列傳
紀年便攷v1宗列傳二第五十四景宗紀事第五十五景宗配享相臣文衡将臣列傳第五十六英祖紀事一第五十七英祖紀事二第五十八英祖配享相臣文衡将臣湖堂第五十九英祖列傳一第六十英祖列傳二莊祖配享第六十一正祖紀事第六十二正祖配享相臣文
紀年便攷v3日誕降壬午封王妃丁丑三月二十六日昇遐旡嗣 明陵大王陵右岡乙㘴嗣景宗大王 玉山府大嬪張氏誕生第一序居嗣英祖大王 毓祥宫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崔氏誕生序居第四○嬪昭寧園楊州高岺里酉坐一女 仁敬王后誕生○早卒二女
紀年便攷v3英祖
紀年便攷v4權僖臯子官至檢左政丞大學士永嘉府院 君未第入耆社謚靖簡子近遇見下後孫宜健號花溪英祖朝進士廢舉講學明於昜數參奉除旨纔下而已殁
紀年便攷v5山於山口設籬門置馬鞭門側約曰有欲赴舉者執鞭以出不敢齒 士君子諸生皆曰敬聞約遂無一人赴舉者名之曰杜門洞英祖朝㫌其洞 正祖朝立祠祀曺林孟三人賜額曰表節八世孫臣俊見下
紀年便攷v7對及錦城事覺鄭麟趾等以上王與知其謀搆誣甚急君即陳䟽力為之辨因此得罪父子俱廢錮卒於益山謪所中宗甲午復官英祖朝賜謚忠景旌閭
紀年便攷v7不起謝絶賓客家人亦莫知托旨也與金叔滋為道義交惟金宗直入謁則開門心語成宗庚子卒年八十九其妻金氏亦享九十英祖朝贈吏判謚靖簡兄弟文科弟季專吏參
紀年便攷v7自傷沉吟筆下乾坤濶爛醉尊前日月長嗟哉潦倒生苦晩懷佳人兮不能忘成宗己酉卒年七十肅宗己卯贈吏參後加贈吏判英祖朝贈謚貞節五世孫宗道見下八世孫根見下九世孫榮福見下五世孫信道以溫陽郡守扈從遇賊戰死五世孫敏道從巡邉使
紀年便攷v7忠立年才七歲奴石釗童暗負逃入金剛山白雲菴削髮為僧乞飯分食有蓮峯老僧者心知而愛教之終至成立以繼金氏之祀英祖朝復官正祖朝贈左賛成謚忠毅
紀年便攷v12別試歷翰林銓郞與趙光祖諸賢同其進退爲正言時與持平尹漑抗疏救光祖罹文綱斥屢年乙酉卒年四十四宣祖朝贈典翰英祖朝加贈副學兄弟文科弟燉承正 孫濯見下瀸見下
紀年便攷v13論 上作鴉鷺歌命和進辛卯入相至領壬辰倭入京城以留都大將退走風聞 大駕渡遼痛恨不食八日嘔血而卒年六十七英祖朝贈謚文憲玄孫宇昇見下
紀年便攷v13強諸孫設壽宴蹈舞乃贈詩曰兄年八十弟稀一身世重逢己卯春徃事悠悠多感慨不堪論與有情人壬午卒年八十三贈吏判英祖以己卯名賢贈左䝺成 哲宗朝贈謚貞翼孫訒贈左䝺成壽麟子字景敏文詞冨贍容儀魁巍早負重望宣祖壬辰難以白衣扈
紀年便攷v16以所獲賊級与蔚山府使裴應褧使之贖罪焉星州伽川之役不幸馬蹶被執不屈死節年四十九贈工議又贈工判肅宗朝㫌閭英祖朝贈謚毅愍子永緖見下
紀年便攷v16乃可奉迎奉迎之際與都承㫖李陽元有多般言詰之事陽元不従大受守正不撓其後陽元入相大受沈滯終身官止工曹正郞英祖朝贈右相謚敏翼子慎見下
紀年便攷v17此招魂也至中和與曺好益杖仲良合兵斬獲甚多力戰因殉節年三十七初 上下教曰金徳濂起義討賊忠義可嘉賜忠武衛英祖朝贈工議加贈正卿謚義烈㫌閭
紀年便攷v19虜甚多矢盡乃手劒撃賊斬数十級乃大呼曰吾力竭當為厲鬼以滅虜遂㐲劒死年四十五仁祖朝屡贈兵參顕宗朝錄用後孫英祖朝加贈兵判子孫居錦山子邦彦登武科仁祖丙子從上入南漢誓殺虜以復父讎及和議成憤甚投江死英相朝贈左承㫖
紀年便攷v21丙子難以老病大臣承命先赴江都丁丑賊至城下知事不濟解所御戎衣付傔人登南城譙門放火自焚年七十七諡文忠旌閭英祖朝贈領相命不祧子光炫見下兄弟文科弟尙憲見光海朝湖堂
紀年便攷v21死而榮脫戎服付與僕與尙宮登南門樓自燒殺母及妻曹氏俱殉孝宗嘗告仁祖曰祥原守死節臣所目見旌表之典不可闕也英祖朝贈君旌閭正祖朝贈諡忠烈
紀年便攷v21駕江都丙子與兄及元成模等集義旅自爲先鋒詣南漢路梗不達乃退從安山ː德物島將入江都遇賊力戰死之肅宗追封君英祖朝旌閭
紀年便攷v21洗易服北向四拜遂相答縊死曰國家之於沈誢無深恩厚澤臨亂死節若非君子何以至此況其妻同死尤極可嘉旌閭贈吏判英祖朝賜諡忠烈妻宋氏先爲自刎死旌閭無嗣以誢遺敎朴長遠奉祀
紀年便攷v22地以祀子斗柄見下內外子孫九十餘人安州人李福希李永植冒刃血戰與以興俱焚死護軍姜大生亦戰死將卒殉難者甚衆英祖朝平安監司尹陽來採聞于朝請加褒賞命幼學申大翼李萬億守城把摠李儉忠武士崔哲蘇朴澤龍贈相當職振武原從功臣
紀年便攷v22以興從事草抵虜檄辭甚壯厲城陷力戰死之年五十二臨死遺其子書曰男兒事業今日決矣無他言贈禮參肅宗朝旌閭院享英祖朝加贈吏判諡忠愍死後卽拜其子炅昊兄弟爲參奉
紀年便攷v22乃歸丙子嶺人起義兵坽出家財佐兵食南漢不守悲憤不已閑門二十年鄭蘊歎曰吾王之有某如武王之有伯夷年六十五卒英祖嘉其樹立比之殷三仁贈諡文貞兄弟文科
紀年便攷v22屈死虜烹之祭天一云惑於妓麒麟時醉眠其家猝聞賊報麟挽起卽上府鳴鼓聚軍而賊已突入中箭而死贈兵判肅宗朝旌閭英祖朝院享正祖朝賜諡剛愍
紀年便攷v22贈遼東伯賜妻子白金仁祖癸亥敎曰金應河捐生殉義獨扶三百年綱常雖古昔忠義之士何加焉其賜應河妻子白金三百兩英祖朝命不祧正祖朝旌閭曾孫重器見下
紀年便攷v23兄翼亨以行誼名自經丙丁之變傷痛憤恨屛居小白山下孝宗朝特除敎官不就英祖朝贈持平
紀年便攷v23皇帝淸主大怒使二甲卒牽去不知所終時年五十二昭顯世子以尺帛招魂而歸之孝宗朝贈都承旨肅宗朝加贈吏判諡忠正英祖朝命不祧加贈領相以從姪應元爲后
紀年便攷v23朝賀令天下薙髮孝一獨不朝賀薙髮詣皇帝陵晝夜哭臨十日不食而死實五月十九日乙巳也三桂收而葬之肅宗朝贈戶參英祖讀孝一傳教曰節義何減三學士乎名其書曰樹烈千秋傳令戶曹寫二本一本藏大內一本藏之史庫正祖朝加贈兵判諡忠壯
紀年便攷v23從與以興抗賊力戰同日殉節卽丁卯正月也年四十贈兵判死於北城上有老校見虜斫命龍髩繼金圈子云顯宗朝旌閭院享英祖朝賜諡忠愍
紀年便攷v23聰明嗜學以才行聞仁朝丙子後讀書不出門安東府使林墰推薦授齋郞不就人稱崇禎處士居安東四十年而卒有八男七女英祖朝贈三品職
紀年便攷v23未見釋居五年以觀察使薦除繕工監役歷主簿出監木川石城以治軍旅缮戎器爲先務官止平市署令顯宗丙午卒年七十四英祖朝贈吏參加贈吏判正祖朝贈諡景憲
紀年便攷v23宋榮春江都水軍也丁丑虜掠其里中榮春奮擊殺賊而死壇享英祖朝守臣李瑜設壇祭善身興業元一三人安夢祥以下諸人分左右配之
紀年便攷v23倭擧長刃左右䂨之骨肉片片永緖正色不變死節年四十六返柩時鄭經世發通護喪諸輓稱之以常山杲卿上命旌閭贈兵參英祖朝加贈兵判諡忠壯享星州忠烈祠
紀年便攷v23騎牛餞于弘濟院袖詩贈之曰天下有山吾已遯城中無主一曰帝子誰朝肅宗庚申卒年八十四朴世采書其銘旌曰大明處士英祖朝特贈吏議官誥書崇禎年號
紀年便攷v23仁祖甲子進士己巳登文科歷翰林兩司官止通政鍾城府使丙子斥和議劾崔鳴吉以此見忤擯斥不用顯宗壬寅卒年六十五英祖朝以斥和特贈吏判諡忠翼子命圭見下○兄弟文科弟懹參判
紀年便攷v24州和已成兵解相向痛哭而散或入深山或退耕于野終身不出興浡不復仕坐不向西燕中物不以近身顯宗壬子卒年七十三英祖朝以孝贈吏議
紀年便攷v24大振南漢圍解兄弟奔問闕下後拜黃州判官文牒不書淸年號節度使申景琥以爲罪啓罷之顯宗壬寅卒年六十一贈都承旨英祖朝旌閭
紀年便攷v24虜捽棨脅刃交下府吏洪慶仁洪信金澤官奴命告家僕鳳伊等左右捍蔽而先死事蹟赫赫英祖朝竪旌五門於表忠碑之傍
紀年便攷v24行且哭穆陵殘日照微誠文章節義甚高嘗宰于寧越泛舟錦江聞皇城陷宣帝自縊失聲哭復作詩寓懷翌年乙酉卒年四十一英祖朝以南漢詩贈副學太皇帝朝贈吏判文衡諡忠憲
紀年便攷v24恬退終始顯宗聞其名招徠不已輒辭不出上下諭曰顧今淸名雅望無踰於卿筆法亦精健名入筆苑壬子卒年六十七贈吏判英祖朝加贈左贊成諡忠敬
紀年便攷v24朝廷以集及洪翼漢吳達濟應副旣至瀋陽虜陣終不屈遇害卽丁丑四月也年三十二孝宗朝贈副學肅宗朝加贈吏判諡忠貞英祖朝命不祧後加贈領相
紀年便攷v24其不起不復强焉甲申天子殉社稷炅北望慟哭挈妻子入五臺山金集止之竟不肯孝宗癸巳卒年四十一所著有再造藩邦誌英祖朝特贈執義
紀年便攷v24尙容趣順長下順長曰相公獨爲盛事乎已而火發幷自焚時丁丑正月也年三十一贈持平肅宗朝加贈吏判又左贊成諡忠烈英祖朝旌閭正祖朝命不祧待是經見下
紀年便攷v24指三學士也及刑也朴爭曰我法學士雖有死罪不以刃而以絞淸人從之旣死賂淸人收屍歸東世子以衣招魂而送之贈吏判英祖朝加贈左贊成諡忠貞正祖辛亥命旌閭不祧子維岳見下
紀年便攷v24牽去西門外二人猶回顧奮罵不知所終時丁丑四月十九日也年二十九官止校理孝宗朝贈左承旨肅宗朝加贈吏判諡忠烈英祖朝命不祧加贈領相旌閭兄弟文科兄達升承旨七世孫顯文見下八世孫□(取?)善見下
紀年便攷v24丹陽人贈左尹嗣安子謙從玄孫字明叔登武科仁祖丁卯爲義兵將與鄭鳳壽共守龍骨山城有勞績歷古山里僉使陞同中樞英祖朝贈戶判旌閭
紀年便攷v24餘人本朝除麟山僉使立因勞悴而卒于軍後八十一年肅宗朝道臣奏實績上見皇朝銀牌毛文龍票文嗟歎久之贈兵參旌閭英祖朝賜祭
紀年便攷v24聞南漢下城不赴會圍失聲哭不食數日告其母曰三綱絶矣請撤舉業母許之因名其堂曰歲寒遂不出以學行薦除敎官不就英祖朝贈執義
紀年便攷v24子光殷痛父非命追服父喪餰粥三年終身不食珎味不着華餙歲往戰地祭之英祖朝道臣聞于朝父子幷旌閭
紀年便攷v24十人又募鄕里丁壯近百人丁丑虜殺南陽府使尹棨犯水原境信得與祈戰于大津全軍覆沒年三十三得其所着紫衣以葬之英祖朝贈執義倣洪翼漢等例敎旨不書淸年號
紀年便攷v24仁祖丙子以藍浦縣監從監司鄭世規爲運糧差使員及師潰不旋踵而戰死孝宗朝其子陳疏祈恩朝廷問于世規良然遂贈官英祖朝旌閭
紀年便攷v24累未足顧也待兒長以此書與之遂決去與同志者尹天祿俱至雙嶺突虜陣格殺三虜而死天祿被創仆積屍中得活歸言如此英祖朝贈戶佐
紀年便攷v24宋渟江華府人仁祖丁丑虜入閭里渟與其二弟漁灦率家僮擊之多殺虜竟俱死之英祖朝幷旌閭褒贈
紀年便攷v24李瑜官判官仁祖丁卯戰死郭山贈職仁祖丁丑江都城陷時宮人陪世子嬪者恐被劫掠多自繆於行宮後苑林木中英祖朝命守臣設壇祭之○皇朝人
紀年便攷v24妹妻之文用談風水占筮一動一靜皆咨之以卜吉凶遂推之于上所著有兵學奇正象緯醫筮堪輿等書仁祖癸亥卒年七十二英祖朝贈兵參且有受敎曰俾施文用之後孫勿簽賤役
紀年便攷v25丙申追奪官爵景宗壬寅因館學儒生黃昱疏卞令廟堂稟處大臣趙泰耈崔錫恒回啓復爵諡還宣院額更刊文集父子幷致祭英祖朝追奪正祖壬寅復官子拯推挹見下
紀年便攷v25近胡物倜儻不羈遊方之外而所守確如也知舊勸仕若將浼焉顯宗戊申卒年四十八及卒時烈曰接輿荷篠今世惟曼倩在焉英祖朝特贈大司憲敎旨書以崇禎年號正祖丙辰敎曰予於贈大憲申曼別致曠感以其賢父之子克繩先武一部陽秋作爲家計自
紀年便攷v26家貧親老除加平郡有祖宗巖潭設壇祀神毅兩皇帝値諱辰北向痛哭郡人感其義號其潭曰李忠潭丁卯不勝喪卒年六十二英祖朝贈吏判大皇帝朝賜謚孝憲孫廷傑見下廷喆見下廷熽見下従曽孫明徽說書廷錫子號艮翁有經學丙申䟽論萬東廟刑配
紀年便攷v27○復享李珥成渾于文廟㓜學辛相東進士朴洵相継䟽請議大臣特命復享○命復金錫冑䓁五人保社勳號○九月第二王子英祖誕生
紀年便攷v27英祖
紀年便攷v27英祖
紀年便攷v27入耆社吾年若及六十而以子孫題名於太祖之下則亦盛事○御景賢堂受宴○建靈壽閣于耆老所奉安宝牒○二月延礽君英祖第一子真宗誕生
紀年便攷v28其賜死之命果主上䖏分則豈有如是問也英祖乙巳復官不待状賜謚忠獻丁未追削爵諡庚申復官辛酉復諡正祖戊戌配享英祖廟庭兄弟文科弟昌協見下子濟謙
紀年便攷v28年七十九諡孝獻子裕夀字毅仲號后溪以文章著名蔭仕正判决事贈吏判孫黽命僉正泰夀子號東溪以文章著名以生貟為英祖入學将命官止翊䝺年四十五卒
紀年便攷v28曰平生勿参黨論若至正卿退居郷廬若至大拜称病勿仕則極貴而令終奎瑞如其言終保身名乙卯卒年八十六諡文忠配享英祖廟庭孫載興持平尚履子李世最外孫以遺逸官止持平正宗丙申誅
紀年便攷v28辛丑生字子賔號屏山又日休亭肅宗丁卯生貟戊寅以咸悅縣監登謁聖歴銓郞副學典文衡景宗壬寅士禍縁㘴為奴於徳川英祖即位甲辰放還乙巳入相至左入耆社戊申錄揚武従㓛癸丑卒年七十三諡文靖兄弟文科弟健命見相臣子徽之見下三世文
紀年便攷v28坡平尹瓘次子彦仁為咸安人始祖武知事天賚子登武科歷忠兵圻水肅宗辛巳登壇拜捴使再任歷御将訓将再任官止刑判英祖即位甲辰臺啓有曰賦性陰慝䖏事㐫譎與逆鏡結為心腹禍國戕人之謀無不陰助拿鞫㐲誅子志見下
紀年便攷v28英祖
紀年便攷v28鄭載崙以太和子為仲父致和后仁祖戊子生尚孝宗淑靜公主封東平尉字秀遠號竹軒所著有日継錄景宗癸卯卒年七十六英祖朝特賜諡翼孝系孫錫五見下
紀年便攷v29移箕伯凡除六藩二赴四不赴莅州按臬嚴明清儉官止左參賛入耆社才學俱優尤長於時務景宗壬寅後歸田不仕䖏義甚正英祖初年力請嚴懲討辨聖誣竟不省决歸韓山因不入洛庚戌卒年七十八謚貞簡
紀年便攷v29徐宗悌渻玄孫司評文道子孝宗丙申生字孝叔肅宗丁卯生進俱中官止郡守己亥卒年六十四以英祖國舅贈左賛成加贈領相達城府院君謚孝僖孫徳修見下
紀年便攷v29羅學川以浚孫以僉樞壽宗子為季父壽星后字師道號滄洲居安東肅宗癸亥登增廣歷兩司官至承㫖英祖即位甲辰以前正言上䟽言今人才渺然而乃棄其三老論南人小北用其一少論見棄者皆小人見用者皆君子耶仍救黃一夏
紀年便攷v29以一藁席收吾骨埋之露梁江上足矣盖六臣塜在露梁故也文章甚高其䟽可讀詣闕獻䟽即命追崇端宗位號官止晉州牧使英祖朝又有言者追復溫陵後特贈承㫖正祖朝錄用後孫族姪益愰武郡守命休子官止諮議
紀年便攷v30見血於同祖之孫乎與三凶罪輕不可并論泰億即徃㘴魁處不可以獨拔為言使一鏡筵奏乃有按律之命訃至之日揚揚出仕英祖即位甲辰入相乙巳遞相左相閔鎮遠率百官庭請三十四啓光佐泰億并削黜丁未復拜左相戊申免是年卒五十四諡文忠乙
紀年便攷v30號謙齋又甬里丙子進士壬午登明科歴翰林丁亥以校理登重試歴銓郞副學兵判戶判以通信使誤事被罪景宗朝典文衡為英祖入學傳士壬寅誣殺金昌集等謀危聖躬教文有不道之語以泰采從弟恬然參於正刑之啓人皆曰如彼無人理之人何靣目拜
紀年便攷v30拯命名肅宗壬午領相金構陳達别薦特除南宣仍賜第歴蔚兵平兵南兵忠兵景宗辛丑登壇拜捴戎使再任歴御將訓將再任英祖朝策奮武㓛二等封咸恩君官止兵判乙卯卒年五十九列傳
紀年便攷v30李森瀤孫監役師吉贈己巳抗䟽贈賛成子張漢相婿肅宗丁巳生字遠伯號白日軒英祖以忠貫白日之義特賜是號早受業於尹拯拯命名肅宗壬午領相金構陳達别薦特除南宣仍賜第歴蔚兵平兵南兵忠兵景宗
紀年便攷v30生也遂與南九萬合為鷹犬每曰若使金鎮圭閔鎮厚而在者吾不得以至於此也景宗辛丑上不道之䟽為萬古所無之逆甲辰英祖即位後以懷刃鍾巫壬寅以吏參䟽諭李頤命金昌集有此句喋恤禁庭壬寅以弘提製進討逆教文有此句之句特命削黜於命
紀年便攷v30吳命峻允謙孫遂良文科拔子吕聖齊外孫字保卿肅宗甲戌以進士魁謁聖歴三司海伯禮判官止參䝺英祖即位初以大司憲䟽論李光佐固寵樹黨之罪被削黜之命三兄弟文科弟命恒見下命新副學
紀年便攷v30使再奚畵虎龍像再奚曰吾於昔年畵肅廟御真今不可以此手畵之配夏怒迫之再奚曰死則死矣决不可為也屢迫而終不聽英祖奇之特為加資其孫窮不能自存有一宰臣請除相當職上可之仍差别軍職
紀年便攷v30李天紀等諸人與白望謀事或以刃是曰大急手或以藥是曰小急手或以廢黜是曰平地手獄卑後策扶社元勳單錄封東城君英祖即位甲辰親鞫上問曰予在東宫汝以何故混入於凶書中耶虎龍曰殿下如青天白日何故入於凶書耶為社稷告變上曰此言
紀年便攷v30英祖賜號
紀年便攷v30李載恒弘遾子弘述再從姪肅宗戊午生字君望李縡門人登武科景宗癸卯士禍以東莱水使徃見兪拓基圍籬中被劾罷職英祖即位甲辰蒙叙官止統使辛亥卒年五十四子國賢見下
紀年便攷v30羣凶伺隙舉朝莫不含默礪獨正色直言所論洪萬遇事深得防㣲杜漸之道壬寅禍作觧官歸鄕癸卯以左袒凶論配靈巖甲辰英祖即位量移忠州乙巳放還拜執義官止通政錦伯戊申卒年五十四子樂曾全城君漷婿以生員䟽陳尹志述之寃登文科官止正
紀年便攷v30興大院君七世孫都正世禎子弘述從孫肅宗辛酉生字士遇中進士景宗壬寅士禍為六人之一是年被酷刑于堂峴年四十二英祖即位甲辰伸寃無后
紀年便攷v30壬寅禍後用李燮獲全之計卒使李鳯祥免於孥知舊之遭刑禍者周旋庇恤卜居于保寧足不入城闉因樹為屋書其壁曰橧巢英祖朝除孝陵參奉內侍教官皆不就風標頎秀器宇古嶷自道義文章以至事物經變之極靡不精叩熟講戊午卒年五十六哲宗戊
紀年便攷v30字士心景宗癸卯一鏡虎龍軰戕害善類後設庭試就商姪愨亦死此獄而志以前參奉揚揚赴其科參榜其父子之無人理可知英祖即位甲辰諸人伸雪仍削其科丁未後又復已經持平而以父累謫耽羅移羅州乙亥潜投凶書拿鞫杖斃子光喆以大逆不道親
紀年便攷v30龜字聖則登武科除宣傳官歴利川昌原順天肅宗戊戌承關西賑救之命四載無餓殍蒙表裏壐書屏風之典景宗壬寅被緣㘴英祖朝伸雪上曰二十載投荒放還故毛髪已成白特除江界上䟽不赴年七十卒洪采取伯兄武監察洪協子鼎新為后緣㘴配金山
紀年便攷v30趙遠命珩曾孫直長祺壽子麟坪大君外孫肅宗乙卯生字致卿壬午進士庚寅登增廣歴銓郞舎人副學英祖即位甲辰明正逆賊鏡虎之罪其黨明誼軰在院覆逆遠命以承旨正色折之拂衣而出歴禮判箕伯官止崇政判敦寧入耆社己
紀年便攷v30在坡州後封永陵行錄誌文并英祖御製
紀年便攷v30與大王陵同原行錄英祖御製誌文李冝顯撰
韓史綮v1之事而無所事於其勤也韓則不然風氣之狹隘爲歷代所未有動觸忌諱手足莫措自燕山朝史獄之慘史筆摧挫而至于英祖則竝以閉蠧自後但有所謂奎章閣日省錄者止載其朝報而遂爲無史之國矣至其草茅之間或有一二記錄而率皆述而不作
國朝人物志v1光海朝仁祖朝一三編仁祖朝二孝宗朝顯宗朝肅宗朝景宗朝英祖朝正祖朝純祖朝憲宗朝哲宗朝
國朝人物志v2及拜相上命鬻內廏馬爲之治第文章古雅典重內掌辭命外接儐价非此莫可一世仰之爲館閣領袖諡文貞英祖對近臣語及公不名必曰沈一松子昶郡守生儒訓儒行儒訓子樸統制使儒行校理儒
國朝人物志v3起聯箚大臣李頤命金昌集李健命趙泰采賜死尹宣擧尹拯復官爵宋時烈祠院幷撤英祖甲辰睦虎龍金一鏡伏誅李頤命等復官賜諡朴弼夢朴弼賢等處斬李明誼柳徠栲斃
(新編) 尺牘大方v1籍居昌益昌府院君守勤女丁未正月十四日誕降乙酉遜位丁巳十二月七日昇遐春秋七十一英祖己未追復○溫陵楊州四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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